[신앙산책] 정조와 다산의 언어유희(言語遊戱)

Google+ LinkedIn Katalk +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언어유희(=말놀이/말장난)”는 ‘아재 개그(아저씨들이 하는 개그)’로 폄하(貶下)되고 있지만 이런 언어유희는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머 장르이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조선시대 초기 제7대 임금 세조(世祖, 1417~1468)가 정승 신숙주(申叔舟, 1417~1475)와 정승 구치관(具致寬, 1406~1470)과의 술자리에서 대화하면서 두 사람의 성씨(姓氏)를 빗대어 “신(新)정승” 또는 “구(舊)정승”으로 호칭을 해서 웃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제22대 임금 정조(正祖)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친밀한 학문적 동지였으며 또한 서로 농담을 던지면서 시시덕거리던 유머의 친구였다. 이 두 사람은 언어유희로 ‘말싸움’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장난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정조: “내가 요즘 떡을 좋아한다네.” *다산: “전하, 갑자기 웬 떡을 좋아하십니까?” *정조: “하하하, 내가 ‘덕’이 부족해서 ‘떡’을 먹으면 혹시 ‘덕’이 풍부해질까 해서라네.” ‘떡’을 먹어서 ‘덕’을 쌓는다는 우리말의 어휘의 ‘경음화(硬音化)’ 발상은 참으로 놀라운 ‘말놀이’이다. 정조는 한글식 말놀이뿐 아니라, 한문식 말장난도 자주 즐겼는데 특히 한글과 한문 속에 들어 있는 의태어(擬態語)와 의성어(擬聲語)를 활용한 대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정조가 “보리뿌리 맥근맥근(麥根麥根=보리 맥/ 뿌리 근)하면 다산은 “피뿌리 직근직근(稷根稷根=피 직/ 뿌리 근)”으로 응수하였으며 정조가 “오동열매 동실동실(桐實桐實=오동나무 동/ 열매 실)”하면 다산은 “고기 일곱이 어칠어칠(魚七魚七=고기 어/ 일곱 칠)로 화답하였다. 다시 정조가 “아침 까치 조작조작(朝鵲朝鵲=아침 조/ 까치 작)”하면 다산은 “낮 송아지 오독오독(午犢午犢=낮 오/ 송아지 독)”으로 맞장구를 쳤다. 

위의 예시된 어휘 중에 맥근맥근(麥根麥根), 직근직근(稷根稷根), 동실동실(桐實桐實) 등의 표현은 ‘매끄럽다’와 ‘질기다’와 ‘둥실둥실’ 즉 ‘물위에 떠있는 모양’ 등을 흉내낸 것으로 의태어(擬態語)이면서 동시에 음독(音讀)과 훈독(訓讀)까지 아우른 것이 된다. 또 조작조작(朝鵲朝鵲)이나 오독오독(午犢午犢)은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니 아주 재미있는 의성어(擬聲語)이다. 이 외에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어휘 중에 “바다 海(해=에) 벼 도(稻) 심을 가(稼)”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의 뜻은 “누가 바다에 벼를 심겠는가, 벼는 논에 심지.”라는 속뜻이 들어 있으니 우리말의 문장을 한자의 훈(訓)과 음(音)을 나열해서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이런 수준의 언어유희라면 실로 지존급(至尊級)의 언어감각이라 하겠다. 말장난 유머도 이 정도가 되면 가히 예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과 정조는 같은 글자 셋을 모아 한글자로 만든 글자를 누가 많이 아는지 내기를 했다. 먼저 정조가 시동을 건다. “계집 녀(女)를 셋 모으면 《간사할 간(姦)》이요.” 다산이 뒤를 잇는다. “날 일(日)을 셋 모으면 《밝을 정(晶)》이요.” 두 사람은 계속해서 주고받는다. “물 수(水)를 셋 모으면 《아득할 묘(淼)》이고”, “나무 목(木) 셋을 모으면 《나무빽빽할 삼(森)》이요”, “돌 석(石) 셋을 모으면 《돌무더기 뢰(磊)》”요, “입 구(口) 셋을 모으면 《물건 품(品)》이요,” “불 화(火)가 셋 모이면 《불꽃 염(焱)》이요.” “벌레 충(虫)이 셋 모이면 역시 《벌레 충(蟲)》이요.” “털 모(毛)가 셋 모이면 《솜털 취(毳)》요,” “귀 이(耳)가 셋 모이면 《소곤거릴 섭(聶)》이요,” “수레 거(車)가 셋 모이면 《수레소리 굉(轟)》이요,” “사슴 록(鹿)이 셋 모이면 《거칠 추(麤)》가 되지요.” 마지막으로 다산이 웃으며 농담으로 끝을 맺는다. “전하께서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한 글자를 놓치셨사옵니다.” “한 일(一)이 셋 모이면 《석 삼(三)》이옵니다.” 

매우 엄했을 것으로 여겨졌던 군신(君臣) 사이에 이런 장난 끼가 짙은 ‘언어유희’가 오고 갔다니 생각만 해도 유쾌한 웃음이 나온다. 정조와 다산은 아주 친밀한 관계였지만 이것을 시기(猜忌)한 세력이 많아 그들의 모함(謀陷)으로 정조가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이후, 다산은 여러 차례 귀양을 가게 된다. 다행히도 다산은 훗날 그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 마재마을[馬峴里]에서 숨을 거둔다. 오늘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이때에 일상에서 우리 「신앙산책」의 독자들이 웃음을 회복하시라는 뜻으로 옛사람들의 언어유희를 보내드리는 점, 양해있으시기 바란다.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