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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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에 민족 대표로 참여해 옥고 치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거사 준비 본격 시작

독립선언의 민족 대표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장로교회 원로 반열에 오른 양전백 목사는 3·1 독립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또 한 번의 옥고를 치렀다. 양전백 목사가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1919년 2월 6일 경이었다. 

어느 날 저녁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 간부로 활약하던 선우혁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선우혁은 신성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그와 함께 옥고를 치른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양전백에게 1월부터 프랑스 파리 근교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전승국과 중립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데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부탁했다. 선우혁에게 이번 파리강화회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가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라는 설명을 들은 양전백 목사는, 독립운동의 취지에 동감하면서 당장은 경찰의 단속이 심해서 모금이 어려우니, 일단 압록강 건너 만주 안동현으로 가 있으라고 했다. 때마침 선천에서는 약 30명의 목사와 90명의 장로, 그리고 1천여 명의 교인이 참석하고 있는 대규모 사경회가 열리고 있었다.

1919년 선천 기독교 청년회(YMCA)가 조직되어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3·1 독립운동 때도 선천의 남·북교회와 신성중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여 전국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북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양전백은 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1명이었으며, 남교회의 김석창도 그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선천교회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이렇게 독립운동 기운이 무르익어 가던 중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정부와 의회에 발송하고 YMCA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기독교계와의 교섭을 위해 급히 상경하라는 최남선의 연락을 받고 상경한 이승훈은 2월 11일 서울 계동 김성수의 집에서 송진우와 만나 기독교계가 거사에 참여하도록 해달라는 부탁에 쾌히 승낙하고, 남대문밖교회에 들러 함태영 조사의 동의를 구한 뒤 동지 규합을 위해 선천으로 갔다. 2월 12일 선천에서는 사경회에 이어 평북 노회가 열렸는데, 노회를 마친 뒤 양전백의 집에서 그를 비롯한 유여대, 김병조, 이승훈, 이명룡 5인의 목사와 장로가 따로 모여 이승훈이 서울에 다녀온 소식을 듣고 거사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이승훈은 2월 14일 평양 기흘 병원에서 길선주, 신흥식 목사와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승낙을 받았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힌 양전백은 평양에서 열린 교회 집회에서 함태영을 만나 그에게 일본 정부와 제국의회, 조선총독부에 보낼 문서에 날인할 도장을 맡겼다. 당초 그는 독립운동의 방식으로 독립 선언이 아닌 독립 청원을 생각했다. 그는 거사 직전까지 제1진으로 50명이 독립 청원선언서를 내고, 그 사람들이 체포되면 다음으로 제2진, 제3진이 다시 독립 청원을 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기독교계 인사들 다수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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