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주기철 목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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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은 1926년 19회로 28세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준동(蠢動)이 거셌고, 교회 내에서는 반 선교사, 반 교권의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일제가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 일제의 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앞으로 주기철 목사가 싸워야 하는 우상의 실체가 현실이 된 것이다.

부산 초량교회 전임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정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에 교회가 정치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 그는 전임자의 목회철학을 배제하고 ‘교회의 교회화’ 또는 ‘신성화’에 주력했다. 그는 목회의 방향을 선교와 교회교육에 두고 교회 성장과 2세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기철 목사는 감소하던 신자의 수를 늘리고 경남노회장으로 당선될 만큼 인정을 받았다.

이때 주기철 목사는 경남성경학교에서 강의했는데 손양원이 그에게서 배웠다. 손양원은 주기철 목사에게서 강한 신앙적 영향을 받고 그의 스승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고, 해방 후 석방되어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목회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공산당에게 순교하여 선생의 뒤를 이어 순교자의 반열에 섰다.

초량교회에서 5년 반 목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마산 문창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문창교회에서 어려운 교회에 와서 수습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서슴지 않고 초량교회를 떠나 문창교회로 가서 교회를 정비하고 엄격한 권징과 치리로 교회의 기강을 세워나갔다. 

주기철 목사는 문창교회 역사를 편찬할 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회 역사를 편찬하도록 했다. 역사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순교자가 된다.

주기철 목사는 이곳에서 아내 안갑수 사모의 급서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잃는 고통을 겪었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어린 것들 넷을 혼자 돌보며 목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평남 강서 출신으로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인 오정모(吳貞模)와 재혼했다. 당시에 적지 않은 신사참배 반대 동지들이 처자들로 인하여 일제와 타협하고 신앙의 절개를 꺾고 신사에 절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정모는 주기철 목사가 순교의 길로 가는 데 강하게 협력했다고 여겨진다.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주기철 목사가 뜻을 굽히지 않자 일제는 주기철 목사의 부인을 불러서 설득하라고 말했으나 부인은 절대 믿음을 버리지 말라며 하나님을 위해 끝까지 싸우라고 당부했다.

1935년 총회가 평양에서 모이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청받아 신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이때 마지막 설교가 유명한 ‘일사각오’라는 설교였다. 목사는 목사가 될 때 한번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첫째,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둘째, 타인을 위하여 일사각오, 셋째,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였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마귀세력 앞에 죽을 각오로 막아서야 한다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자기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며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마산에서 6년의 목회를 마칠 무렵, 평양의 산정현교회로부터 옛날 오산학교 은사인 조만식 장로 일행이 마산까지 내려와 청빙하자 이를 수락하고 평양으로 올라갔다. 이 길은 순교의 길이었다. 이때가 1936년, 일제가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집요하게 강요하기 시작한 때였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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