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아차, 큰 버스에 속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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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수도권엔 5개 신도시가 개발되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한소망교회는 개척되고 있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유행가 가사가 당시 개척지를 찾는 나의 주제곡이었다. 내 아버지가 6.25 전쟁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하셨다가 적탄에 맞아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내 아버지가 나라를 지키다 북녘땅에서 피를 흘리셨다면 나는 한민족 내 나라에 복음을 전하다 죽으리라 그래서 북한 땅이 보이는 일산 신도시를 개척지로 정하고 한국의 소망, ‘한소망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일산 신도시 첫 입주 지역이 백송마을이었다. 우리는 신도시에 들어갈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외곽 농촌 마을 능곡 지하실 조그만 한켠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입주 첫날부터 우리는 45인승 버스를 주일마다 빌려 백송마을 입구에 세우고 교회를 찾는 교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얀 모자 흰 장갑의 젊고 예쁜(?) 여성 승합차 운전사가 웃으며 버스에 타는 교인을 영접했다. 

모두들 아마 이 마을 어디 큰 교회가 있는가보다 생각하고 일단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사람이 다 차면 승합차에도 몇 사람 올랐다. 버스와 승합차는 신도시를 벗어나 좁은 길 논길을 지나 논밭 가운데 서 있는 작은 근린상가 지하실 예배당 앞에 섰다. 이미 버스를 타고 오며 교인들은 느끼고 있었다. 아차, 큰 버스에 우리가 속았구나! 꼬부랑 지하 예배실 계단을 내려가며 이왕 온 김에 한 번쯤 예배를 드리고 가자라고들 생각했다. 

몇 사람 안되는 교인들과 버스를 타고 와 처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에서 사람들은 이미 은혜에 젖어 마음은 뜨거워져 있었고 모두들 눈시울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예배실을 나오면 흰 모자 흰 장갑 묘령(?)의 그 여인이 다시 안내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인이 개척교회 사모였다. 사람이 없을 때였으니 사모가 승합차 운전사, 주방장, 찬양대 지휘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 교인들이 모이면 그 당시 얘기로 꽃을 피우곤 한다. “우리가 그때 큰 버스에 속았지?” “나는 흰 모자 흰 장갑 여인의 유혹에 속았어” “김균태 장로, 김혜완 장로, 이원영 장로, 배기명 장로 모두 속아서 장로 된 사람들 아냐?” “속아서 탄 버스가 농촌길 꼬부랑꼬부랑 갈 땐 아찔했는데, 그 지하실 첫 예배는 더 아찔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의 예배에 생명을 건다. 한 명이 모여도 만 명이 모인 것처럼 설교하고, 만 명이 모여도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를 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비 오는 날에 태어난 하루살이처럼 한 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죽게 해서는 안된다. 어쩌다 한번 간 교회 예배가 그 영혼을 감동시키고 구원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 그 핏값은 누가 져야 할까? 속아서 탄 버스도 영원을 좌우할 수 있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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