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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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년고생’ 성공사업 가능케 한 소중한 자산

  좋은 점 기억해 선망하고, 닮아가려 하면 

관계 좋아지고 신뢰 및 좋은 습관 배워

서울 아이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재미있는 동화 구연처럼 들렸다. 속으로 따라 하면서 배우려고 했다. 그렇게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친구들, 서로의 좋은 점을 배우려 하고 칭찬할 줄 아는 친구들을 만난 것이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가 목사님이 교장선생님으로 계신 미션스쿨이기에 더 그랬던 듯했다.

그때의 영향으로 살아가면서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났을 때 샘내거나 깎아내리기보다는 좋은 점을 칭찬하고 배우려는 습관이 생겼다.

참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습관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앙생활, 사회생활, 가정생활, 비즈니스 영역 모두에서 평생 귀하게 쓰인 자산이었고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경쟁력이 됐다.

사람은 7분마다 한 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7분마다 한 번씩 고민하고 결단해야 한다. 처음엔 어렵지만 7분이 쌓여서 7시간이 되고, 7시간이 쌓여서 7일이 된다. 그것이 7년이 되고 마침내 일생의 습관이 된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시편 34:13)

하나님의 이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고통의 멍에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다. 살면서 자신보다 잘나고 멋진 사람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많은데, 그때마다 자신의 못난 면을 괴로워하고 위축되고 숨기고 뒤틀리고 모난 모습으로 상대를 질시하고 깎아 내려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과 사귈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기회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흉내내고 선망하고, 따라하려고 노력하면 관계가 좋아지고 신뢰가 생긴다. 새로운 좋은 습관을 배운다.

촌놈을 편견 없이, 악의 없이 순수하게 대하고 이끌어준 서울 친구들 덕분에 나는 이런 생각에 눈을 떴고, 평생의 좋은 습관을 익혔다. 지금도 표준말을 익히려고 연습하던 그때처럼 라디오방송을 들으면서 새로운 문장이나 어휘, 격언을 들으면 습관적으로 되뇌며 외우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버릇이 팔십 중반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르고 번 가장 귀한 장사 밑천

지나간 일을 가정하는 것은 덧없지만, 만일 내가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아버지 슬하에서 유복하게 자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커서 40년간 일군 그 사업을 만나거나 그만큼 성공시킬 수는 없었으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자산이 바로 ‘초년고생’이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영등포역 근처 미군부대 PX 앞에서 한 달 동안 구두닦이를 한 적이 있었다. 중·고교 시절 내내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했던 일은 신문배달, 그리고 묵은 잡지를 싸게 사다 버스나 기차에서 파는 일이었다. 이 일들은 당시 고학생의 일거리로 인식돼 있어서 교복 차림으로 해도 제지를 받지 않았다. 청량리에서 떼 온 ‘아리랑’, ‘명랑’, ‘여원’ 등 과월호 월간잡지를 팔기 위해 기차에 오를 때, 차장들을 향해 교모에 경례를 올려붙이면 차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임승차를 용인해주곤 했다.

그런데 이런 ‘고상한’ 일만으로는 아무래도 살기가 너무나 빠듯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못 낸 학생은 시험을 치지 못하게 했다. 시험을 못 치면 학년 승급도, 졸업도 못했으므로 하루하루의 학교생활이 조마조마했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기 어려웠다. 형님과 살 때도 있었고 자취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건 제대로 밥을 지어먹는 날보다는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그러던 차에 한 친구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여름방학 때 구두닦이를 하자는 것이었다. 돈이 쏠쏠히 벌린다는 말에 선뜻 그러자고 대답했다. 함께 나무판자를 구해 구두통을 짜고 구두약을 살 때까지만 해도 그저 잘되려니 했고 기대와 설렘으로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 당황한 것은 구두닦이를 하려면 교복을 입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교복은 내가 이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라는 유일한 증명이었다. 그렇지만 교복을 입고 구두를 닦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교복 외에는 다른 외출복이나 평상복도 없었다. 옷 살 돈도 없었지만 옷을 파는 곳도 없던 시절이었다. 하는 수 없이 군복을 염색해서 줄여 입었다.

영등포역 앞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는 미군 PX가 있어 미군들의 왕래가 많았다. 역 바로 앞에 돈 많은 신사들이 드나드는 동양다방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친구는 “헤이, 슈사인!” 하면서 지나가는 미군에게 달라붙어 금방 개시를 했다. 그러나 나는 엄두가 안 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구두닦이란 지금처럼 한 자리에 앉아 찾아오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일이 아니다. 구두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구두 닦을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구두 닦으세요, 네?” 하며 귀찮게 해서 “어허, 이놈 참”하며 마지못해 닦도록 하는 일이었다. 영등포역 앞에 진을 친 소년 구두닦이들만 수십 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친구는 자기 일을 하는 중간중간 “너, 저기 저 사람한테 붙어봐” 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아저씨, 구두 닦으세요”라고 여러 번 연습하고 나온 말을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외쳐 보았지만 정작 나오는 소리는 도로 속으로 기어들어가기만 했다. 그렇게 쭈뼛거리는 사이 첫날은 결국 친구가 연결해준 두 명의 신발만 닦았을 뿐이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나에게는 도저히 안 맞는 일이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다행히 며칠이 지나면서 점차 요령을 터득했다. 구두를 닦을 만한 사람을 찾는 안목과 구두를 닦고 싶어지게 만드는 설득력도 생겼다.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배짱도 제법 커졌다.

그때부터 손님을 설득하는 방법,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읽고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연구했다. 구두닦이 수입은 갈수록 좋아졌다. 저녁에는 1달러, 10달러, 1만 환짜리가 주머니에 수북했다. 소심했던 내 성격과 기질이 바뀌는 대전환기였다. 당시에는 영등포역 앞을 중심으로 ‘삼일당’ 깡패 조직들이 대단했는데, 우리 고학생들만큼은 괴롭히지 않고 봐주었기에 신나게 구두닦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두닦이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등포 경찰서에서 청소년 선도사업을 한다고 경찰서 안에 야간학교를 세웠고, 거기 다니는 학생들만 구두닦이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한 일제 단속으로 나를 비롯한 구두닦이 소년들은 모두 구두 통을 빼앗겼다. 그중 나와 내 친구는 이미 학생이기 때문에 구두닦이를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구두 통도 돌려받지 못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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