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정통신앙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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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신앙은 성육신(成肉身), 창조주 하나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 이를 믿음으로 영적인 거듭남,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신앙이다. 자신의 의로움, 선함, 업적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고 무가치하다고 하신다. 구원은 내 개인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만 가능하다.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 교리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했고 개신교의 정통 교리가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정통신앙은 지켜져야 한다.

 종교 개혁 이후 50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청교도 신앙과 1700년대 후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등에 의한 부흥 운동 등 주요한 부흥이 있었다. 그 후로는 정통 개혁 신앙에 뿌리를 둔 신앙은 침체되어 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삶의 깊이가 있고 참된 지각(知覺)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깊은 영적 묵상과 생각에서 생겨난다. 경건한 묵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해야 할 부분이다. 부흥은 죄인을 회개케 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이루는 것이다. 부흥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役事)하심이다.

 묵상은 자기 검토가 따른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자라가야 한다. 그리스도께만 중심을 두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 드리는 믿음의 삶이다.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 삶은 정통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백성이 광야에서 전진(前進)하는 일을 두려워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나아갔다. 참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겸손한 신앙의 모습이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통계 숫자가 아닌가? 교인 수를 어떻게 더 증가시킬까? 그 방법과 수단들에 대해 논의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에 대한 염려를 했다는 얘기는 듣기 어렵다. 교회는 인간의 조직체가 되어 가고 있다. 모세가 염려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고객(교인) 만족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선하는 교회는 정통신앙에서 이탈한 것이다. 최근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인 ‘자기 존중’,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것은 거짓 복음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이다. 고통이 따른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의 위협과 온갖 박해를 당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면서 거절을 당하셨지만 일체의 타협은 없으셨다. 복음 앞에서 더 겸손해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죄인 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진정으로 흘러나와야 한다.

평생 동안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던 지도자가 노년(老年)에 인간적 탐욕(貪慾)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가벼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깊이 없는 말 몇 마디로 구원의 확신을 주고받는 일도 숙고해 봐야 할 일이다. 바른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참된 믿음의 기초가 심어져야 한다. 구원받은 예수의 참된 제자들은 거룩한 두려움과 은총을 함께 갖는다. 마귀, 어둠의 권세를 이기는 말씀, 즉 성령의 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옳다. 오늘 이 시간에도 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며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싶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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