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63)

Google+ LinkedIn Katalk +

해방 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귀환과 헌신

선교사 재입국과 사역

강제 출국을 당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본국에 돌아가 하나님의 정의가 꼭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각자 맡겨진 새 일터에서 사역에 임했다. 더욱이 미일 포로 교환에 의해 타마자 선교사 부부, 유화례, 닷슨 선교사는 1942년 4월에 출국해 그리운 고국에 안겼다. 여기에 일본의 패전과 미국의 전승은 비단 미국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만의 기쁨만은 아니었다. 그 동안 신사참배 반대로 곤욕을 당했던 한국인 목회자들과 신도들, 그리고 온 국민은 그 잔인한 일제 36년에서 벗어난 그 기쁨을 만끽하면서 교회 재건과 학교 재건에 앞장섰다.

역시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순천선교부 소속으로 있으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던 구례인 선교사는 1945년 10월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 본부의 명령을 받고 한국 교회 실정을 파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여천 애양원 원장이었던 윌슨 선교사는 1946년 1월에 미군 군용기편으로 돌아와 호남 지역을 살폈다.

그런데 애양원에 수용되어 있던 나환자들의 생활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이에 놀란 윌슨은 재입국시 가지고 왔던 의약품과 식량을 내놓고 나환자를 도왔다.

“원장님,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원장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배려해 주신 은혜 너무나 감사합니다. 쌀 한 톨도 구경하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들녘에 나가 풀 뿌리로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윌슨 선교사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뜨거운 악수를 나누면서 하루를 보냈다. 적은 식량을 받고 기뻐하는 이들의 모습에 너무 감격해서 즉시 미국 본부에 연락해 식량과 약품 옷가지 등을 보내 달라고 앞장서기도 했다.

대부분 미션학교 건물은 미군들이 진주해 교사를 병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천 매산여학교 교사는 미군의 실수로 화재를 당해 흉물로 남아 있었다.

또한 1946년 6월에 전북에는 인돈 선교사가 전남에는 김아각 선교사가 도착해 각각 자신들의 구역을 살피고 있었다. 인돈 선교사는 마지막 교장으로 재직했던 신흥학교와 그 옆에 있는 기전여학교를 돌보고 복교 준비에 힘을 기울였으며, 김아각 선교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는 복교를 하고 있었으며, 신사참배 문제로 각 노회와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모든 문제도 해결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의 종합적인 보고가 끝나자 1947년 2월에는 미국 본부에서 호남 지방 선교의 재개를 위한 전략회의가 열리면서 곧 호남 지방에서의 선교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7년 4월에는 해방 후 첫 연례회가 모였으며, 1948년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어느덧 29명이나 다시 내한해 각 지역에 재배치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선교사들 중에는 재입국했던 선교사들의 명단이 보인다. 이들은 그 혹독한 일제의 감시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으며, 더구나 주위의 환경과 여러 가지의 취약점도 있었지만 그것도 개의치 않고 다시 한국으로 재입국했다. 또한 새로 온 선교사들도 의욕을 갖고 선교에 임했다.

재입국한 선교사들은 마지막까지 호남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재입국했으며, 이들 중 순천의 보이열 선교사, 광주의 타마자 선교사, 목포의 조하파 선교사, 전주의 인돈 선교사 등은 훌륭한 사역을 감당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2세 선교사까지 파송되었는데 2세는 모두 전라도에서 출생해 이들의 고향은 ‘전라도’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타마자 선교사의 아들 타요한, 보이열 선교사의 아들 보계선 (Kenneth Elmer Boyer), 조하파 선교사의 아들 조요섭(J. B. Hopper), 인돈 선교사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한국 선교에 생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해방 후 처음으로 입국해 일생을 호남 선교에 헌신했던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중 의료 선교사로서 호남 선교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 있다. 우선 전주 예수병원을 일류 병원으로 만들어 놓았던 구바울 선교사의 공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평양신학교와 해방 후 장로회신학교 교수였던 구례인 박사의 아들로서 의사가 되어 23년간 전주 예수병원 원장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또한 광주 제중병원은 광주 기독병원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고허번 선교사가 원장으로 시무하면서 현대 시설로 만들고, 전남 지방에서는 가장 훌륭한 시설로 병원을 운영했다. 그도 역시 24년 간 은퇴할 때까지 젊음을 바쳐 광주 및 전남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했다. 더욱이 그의 부인은 간호사로서 모든 환자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던 사람이었다.

일제시대는 군산에 예수병원, 순천에 알렉산더 병원, 목포에 프렌치 병원이 있었지만 해방이 되고 선교사가 재입국하자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으나 전주 예수병원과 광주 기독병원만은 일류 병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선교사들은 해방된 한국에서는 스스로 교회를 이끌어 갈 농어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광주, 목포, 전주, 순천 등지에 고등성경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이 학교의 책임자는 거의가 선교사들이 맡았다. 이곳 출신들은 성경학교에서 배운 실력을 갖고 농어촌 교회의 사역자로 활동했으며,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 모두들 지방 신학교나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한국 전쟁으로 선교사들이 위축을 받고 일시 후퇴했다가 수복되자 다시 원대 복귀하고 사역에 임했다. 그중 대전의 대전대학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 사업 중 가장 훌륭한 사업이 되었다. 이 미타마자 선교사는 광주에 미션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인돈 선교사는 전주에 미션대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이때 선교부에서는 1956년 1월에 대전선교부를 상설하고 그 해 4월 10일에는 대전기독학관이란 간판을 걸고 신입생 82명을 모집했다. 3년 후인 1959년 2월에는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 인가를 얻고 대전대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대학의 설립자 겸 초대 학장이었던 인돈 선교사의 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후 타요한 선교사가 2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완전한 틀을 만들어 놓고 오늘의 한남대학교가 탄생되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