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유인물(油印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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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油印物)은 회의나 단체 활동에서 안건이나 정보를 미리 인쇄해 참석자에게 배포하는 문서다. 이 용어는 복사기 이전 시대의 인쇄 장비인 등사기(謄寫機, Mimeograph)에서 유래했다. 이를 일명 일본어의 잔재인 ‘가리방’이라고 불렀다. 등사기는 실크스크린과 같은 공판인쇄 방식으로, 유성(油性) 잉크를 사용했다. 얇은 기름먹인 종이(등사 원고) 위에 철필로 글씨를 쓰면 기름종이에 틈새가 생기고, 이를 통해 잉크가 종이에 새어 나오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기름 유(油)자를 쓰는 유성 잉크로 인쇄한 물건이라 해서 ‘유인물’이라 불렸다. 등사기는 인쇄 비용이 저렴해 학교 통지문이나 교회 주보 등을 대량 인쇄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였다.

오늘날 복사기나 프린터의 발달로 제작 방식은 달라졌지만 ‘유인물’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회의나 교육 현장에서 자료(handout)라는 의미로 널리 통용된다. 회의 안건, 보고서 등은 유인물 형태로 배포되어 공식적인 기록물의 일부가 된다. 

유인물은 본래 회의의 효율성과 충실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유인물대로 받기로 동의합니다”라는 관행이 노회나 총회 등에서 빈번하게 남용되면서, 유인물의 본래 목적이 퇴색되고 회의의 민주적 기능을 마비시키는 해악을 낳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회의가 토론과 숙의의 장이 아닌 형식적인 승인 절차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유인물대로”는 “이미 결정된 내용대로” 받으라는 주문이며, 이는 참석자들이 안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회피하게 만든다.

이러한 관행은 책임 의식 결여와 편리 주의를 부추긴다. 특정 집단의 의도가 담긴 안건이 비판 없이 통과되는 비민주적 결정을 용이하게 만들기도 한다. 중요한 사안이 졸속 처리되고 이면 합의가 감춰지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유인물대로”라는 말은 사고를 정지시키는 습관성 발언이 되어, 집단의 주도 세력이 의도한 대로 회의 결정이 내려지기도 한다. 

회의의 근본적인 이유는 공동체의 지혜를 모아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함이다. 유인물은 이를 돕는 수단일 뿐, 회의의 결론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유인물대로”는 숙의 민주주의를 해치는 낡은 관행으로 사라져야 하며, 회의는 토론과 심의가 중심이 되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유인물(油印物)의 본래 기능이 회복되어 건강한 회의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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