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 뒤에 숨어 갈등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삶을 ‘겸손’과 ‘화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그 달콤한 평화가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조용한 독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공동체일수록 비판과 긴장, 진실의 언어가 사라진 채 무기력한 침묵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1. 침묵하는 공동체와 ‘비겁한 선함’
모두가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입을 닫는 사회는 결국 역동성을 잃습니다. 기준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다수의 기분’과 분위기에 맞춰질 때, 공동체에는 진실한 비판 대신 아첨과 눈치만 남게 됩니다. 갈등을 두려워해 침묵하는 것은 결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선함’일 수 있습니다. 쓴소리가 사라진 공동체는 자정 능력을 잃고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는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태도는 공동체적 책임을 외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불의와 왜곡 앞에서 침묵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동조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2. 고래를 키우는 ‘소금기’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만, 소금기 어린 쓴소리는 고래를 더 깊은 바다로 이끈다.”
우리는 칭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칭찬만으로 깊은 성장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춤추는 고래는 아름답지만, 깊은 바다를 헤쳐 나갈 힘은 춤이 아니라 근육에서 나옵니다. 그 근육은 때로 불편하고 아픈 진실을 마주할 때 길러집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쓴소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은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죄와 부패를 외면하는 공동체는 결국 맛을 잃은 소금처럼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소금은 짜야 소금입니다.
3. 미움받을 용기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우리는 종종 ‘현명한 사람’을 갈등을 피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지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진짜 현명한 신앙인은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기꺼이 미움받을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본질적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는 각자의 자리에서 시대를 향해 경고를 외쳐야 하는 파수꾼입니다. 우리의 직업과 전문성 역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지나치게 불편함을 회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공동체는 일정한 긴장감을 필요로 합니다.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듯, 거룩한 쓴소리는 사회와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힘입니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동조입니다.
결론: 좋은 사람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은 비교적 쉬운 길입니다. 웃으며 갈등을 피하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삶은 당장은 평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하고, 누군가는 비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성경 속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 앞에서 진실을 말했듯, 오늘의 그리스도인 역시 시대 앞에서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의 안일함이 타인의 성장을 막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침묵이 사회의 부조리를 방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가장 따가운 말이 가장 깊은 사랑이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좋은 사람’으로 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진리를 드러내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데 있습니다.
침묵 속의 안일함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양지청 장로
<영락교회, 서울대학교 기독교 총동문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