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빙의 맥아더 거리에 이사한지 얼마 안되어 송 목사 내외가 심방을 왔다. 오면서 풀 사이즈 매트리스를 승용차 위에 싣고 왔다.…
뒤돌아본 삶의 현장
직장을 갖게 되자 아내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태평하였다. 그때 우리가 느꼈던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분명 받고 있다는…
78년 6월 20일 미시간 주립대학이 위치한 이스트랜싱을 떠나 도중에 3박을 하고 우리는 무사히 댈러스에 도착하였다. 박 박사는 오스틴으로 떠나고 우리는…
박 박사는 에어컨도 없는 매버릭으로 막내아들과 함께 이삿짐을 나누어 싣고 길을 안내하며 떠났고 나는 의사 집사로부터 싸게 산 올즈모빌에 짐을…
미국에서 유학생인 나는 새살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한 사람의 장학금으로 세 식구가 살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얼마 동안은 아내가 가지고 온…
한국에서 아내는 초청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6월에 다음 학기 장학금이 확정됐는데도 서류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내를 부모님께…
이 대학에는 한국 학생들이 꽤 많이 와서 살고 있었다.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부부 아파트가 있어 부부는 따로…
이한빈 총장이 임기를 마치기 전 나는 소망하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때는 대학교수의 자질을 향상하기 위해 모든 대학교수는 박사학위를 가지도록 교육부는…
1973년 김형남 총장은 이제 두 대학이 통합되고 종합대학에 되어 발전의 터전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여 이사회를 통해 제2대 총장으로 이한빈 박사를 추대하고…
1972년부터 1975년 초까지 3년 동안은 내가 대전노회 평신도 연합회장을 맡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모임은 언제부턴지 남선교회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