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이한빈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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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김형남 총장은 이제 두 대학이 통합되고 종합대학에 되어 발전의 터전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여 이사회를 통해 제2대 총장으로 이한빈 박사를 추대하고 총장직을 고사하였다. 

이한빈 박사는 1951년 서울대를 거쳐 미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다시 1967년 서울대에서 철학박사를 마친 분으로 학계, 정계에 많은 활동을 하는 분이었다. 교육부 장관 비서, 제11대 재무부 정무차관, 주제네바 대표부 공사, 주스위스 대사 겸 오스트리아, 바티칸 대사, 하와이 EWC 기술 및 발전연구소 소장, 하와이대 총장 특별고문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한국 미래학회와 자유지성300인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는 총장 취임사에서 “숭전인은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봉사정신을 체득하여 사회에 적극적으로 공헌하려고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 뒤 “숭전인은 전문지식을 길러 자연과 사회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고 말하며 재임 기간 중 이러한 ‘숭전인’의 육성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실제로 대전에는 ‘지역개발 연구소’를 설치하여 지역사회와 기업의 연구과제를 대학이 연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지역사회와 기업의 반응을 다시 대학의 교과과정에 반영함으로써 대학의 기능을 활성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하와이 대학에서의 경험을 이 대학에서도 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하와이 대학에서 만났던 교수를 여러 명 대전에 영입하고 또 그곳에서 대학과 지역사회가 협력 개발했던 프로젝트를 모방해서 대전에 ‘지역개발학과’ 신설을 추진했다. 당시 지역개발학과는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학과여서 우리는 이 학과가 지역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하는 학과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또 그 약자는 ‘지개과’여서 무슨 대학에 ‘지개과’가 있느냐고 조소하기도 했다. 어떻든 그는 참신한 새 계획을 많이 시도했다. 두 캠퍼스의 불균형을 감지한 그는 본부나 분교의식을 없애기 위해 매주 한 번씩 대전에 내려와 교무위원회를 주관했다. 그리고 총장이 대전에 거주할 총장공관을 세웠는데 그것이 가정교육과 생활관이 되었다가 지금은 디자인 팩토리로 바뀌었다. 그는 본부, 분교의 생각을 버리고 총장이 기거하는 곳이, 본부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총장제를 폐지하고 양 캠퍼스에 학감(provost)제도를 두어 학감은 총장 부재 시에 그 캠퍼스의 총장을 대신한다며 학감에게 많은 전결권을 이양했다. 두 캠퍼스에 공통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합동 교무위원회’ 또 때로는 ‘확대 교무위원회’를 열어 의견을 종합했다. 예산은 각 캠퍼스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되 서울 캠퍼스의 총장실과 기독교 박물관 등 두 대학의 상징적인 기구(overhead)의 운영자금은 양 캠퍼스에서 재학생 비율로 부담하기로 했다. 대전 캠퍼스와 서울 캠퍼스의 통합 당시는 재학생 비율이 180:400이었으나 이 총장 취임 때는 260:440 그리고 정부의 지방 대학 육성책으로 대전은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하여 1978년에는 730:620으로 역전되었다. 

그는 두 캠퍼스가 이질 집단이 아니고 동질 집단인 것을 의식하도록 많이 노력했다. 예를 들면 『숭전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은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역사가 깊은 숭실대학의 개교기념일인 10월 10일로 하자고 설득하고 1974년 10월 10일 개교 77주년 기념식을 서울에서 거행했다. 양 캠퍼스 교무위원과 주임급 인사는 다 참석하게 하고 양 캠퍼스의 연합합창단이 축가를 불렀다. 대신 대전의 개교기념일인 4월 15일에는 ‘청림 축전’을 하여 전교생이 체육대회로 그날을 기념하였다. 그가 외친 “2000년대의 어귀에서 미리 가서 기다리자”라는 구호는 모든 숭전인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가 떠나기 전 1976년 9월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는 이 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숭전대학교』의 총장을 연임하지 못하고 한 표 차로 숭실대학의 동문에게 넘겼다고 한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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