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특집 특별기고] 노벨평화상 수상자 폰 주트너, 헤이그특사단 돕다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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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남작여사

체코 수도 프라하 시청 앞 광장 내 얀후스의 동상 뒤로 킨스키 궁전(현 국립미술관)이 있다. 궁전으로 들어가면 왼쪽 벽면에 한 여인의 부조상이 있다. 그녀는 이 궁전에서 1843년에 킨스키 백작의 딸로 태어나서 1905년에 여성으로 첫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남작여사이다. 이 여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일명 헤이그특사단의 활약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해프닝으로 끝날 뻔했다.

만국평화회의장에서 문전박대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6월 25일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헤이그에 도착한 3명의 대한제국대표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문전박대였다. 당초 대한제국은 주최국인 러시아로부터 서면 초청을 받았지만 회의장 입장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대한제국이 처음으로 국제회의에, 그것도 유럽에 공식적으로 고종 황제의 명을 받은 대표단을 파견한 것이 헤이그특사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공식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대표단은 그냥 아무런 흔적조차 없이 해프닝으로 사라지는 운명이었지만 구사일생으로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고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대표단의 성명서가 6월 30일자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리면서 45개국 참가국 대표단과 유럽 사회에 조선 문제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이란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부당한 침탈을 받고 있다는 호소문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에는 두 사람의 숨은 기여가 있었다. 한 사람은 만국평화회의보의 편집장이자 기자인 영국인 윌리엄 토마스 스테드(William Thomas Stead)이고 또한 사람은 이 신문의 발행인이자 여성으로서 1905년에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남작부인이다. 이들은 조선대표단의 딱한 사정을 듣고 이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알릴 공개 기자회견을 주선하고, 그것을 ‘만국평화회의보’에 크게 실어주었다.
폰 주트너 여사는 1876년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이 파리에 체류할 때 그의 비서로 잠시 일한 바가 있다. 폰 주트너는 비서를 그만 둔 직후 남편 아르투어 폰 주트너 남작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밀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가문에서 내쫓겨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전업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점차 전쟁반대 평화운동도 시작하였다. 그녀의 시민운동은 기존의 정치운동과는 달리 하나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사회시민적 운동으로 유럽 전역에 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그 영향력이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녀는 1889년에 소설 《무기를 내려놓으라!(Die Waffen Nieder!)》를 발표함으로써 평화운동의 선구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이 책은 12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독일어권에서만 2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폰 주트너는 일약 반전의 아이콘이 되었다. 1892년부터는 자신의 책 제목인 《무기를 내려놓으라!》를 잡지 이름으로 만들어 국제 평화운동 전문잡지를 발행하였다. 노벨의 비서로 인연이 시작된 그녀와 노벨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 정신적 지적 교류는 노벨로 하여금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노벨상을 만들게 하는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노벨상에 평화상을 추가한 것도 폰 주트너의 아이디어였다. 그녀는 1891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최초의 평화운동단체인 ‘평화협회’를 발족시켜 1914년 임종할 때까지 의장으로 활동했다.

▲ 오스트리아 2유로 주화(폰 주트너 동판)

■ 제1회 만국평화회의의 산파역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선왕 알렉산드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894년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짜르(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이중제국, 이태리 등이 3국 동맹을 맺음으로 이에 대항해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는 등 유럽 대륙이 진영 대결의 장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이때 폰 주트너 여사는 새로 즉위한 니콜라이 2세는 선친과는 다른 노선을 걸을 것으로 희망하며 그가 평화운동에 협조하도록 여러 형태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마침 1897년에 니콜라이 2세가 자신의 왕후(독일 헤센-다름슈타트 공주 출신)인 고향을 방문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짜르의 장모와 친분을 맺고 있었던 폰 주트너 여사는 짜르에게 평화운동 방안을 권고하자 짜르는 그녀에게 “세계평화에 대한 위대한 아이디어(grosse Ideedes Weltfriedens)”라고 친절하게 화답을 하였다. 이런 계기로 말미암아 1898년 8월 24일, 러시아 외무장관 무라비요프 백작이 페테르부르크 주재 모든 외국 공관에 ‘짜르의 평화선언’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를 제안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다른 패권국에 비해서 산업화의 지연으로 여러 면에서 뒤쳐진 상태였고 특히 해군력을 증강시키는 시간을 확보할 속셈도 가지고 짜르는 세계평화보장을 위한 협의체 같은 것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일단 짜르가 공개적으로 평화회의를 들고 나온 상황에서 폰 주트너는 이것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국의 동조가 필요한 만큼 이를 지원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하려 광범위하게 여러 평화단체나 정당, 인사들과 연대를 만들어 나갔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운동가들인 리프크네히트, 아우구스 베벨, 칼 카우츠키, 그리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국제평화운동가인 스테드 등과 국제적 여론을 조성해 나갔다. 스테드는 평화회의 개최를 위한 ‘국제평화십자군’을 조직하여 유럽 대도시에서 대규모 평화촉구 군중집회를 선도해 나갔다. 폰 주트너는 이것을 ‘스테드 순례’라고 불렀다. 마침내 최초의 세계평화회의가 당시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의 수도인 헤이그에서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생일에 맞추어 26개국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1차 만국평화회의(1899년 5월 18일~ 7월 29일)로 개최되었다. 폰 주트너 여사만이 단 한 명의 여성으로써 1차 회의 개막식 참여가 허용되었다. 유럽국가 외에도 미국, 멕시코, 중국, 일본, 태국 등이 참여하였다. 만국평화회의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폰 주트너, 스테드, 블로흐(Bloch), 노비코브, 프레이드 등은 공식회의장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기에 회의장 밖에서 회의소식지를 만들어야 했다. 이들은 참석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회의내용과 진행을 신문으로 세상에 알렸다. 1차 회의의 대표적인 결과물로는 비록 강제력이 없지만 ‘국제중재재판소’ 설치안이 있다.

■ 러시아의 사주로 헤이그 특사단파견

제1차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후 국제정세에서 가장 큰 변화는 러일전쟁이 1904년 2월에 발발한 것이다. 1905년 러시아는 일본에 대패를 하였고, 양국은 미국의 중재로 8월에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를 갖게 되었다. 패전한 러시아는 일본에게 남 사할린섬 할양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된 조약으로 9월 16일 휴전에 서명했다. 니콜라이 2세는 일본으로부터 당한 국제적 위상 실추 그리고 사할린, 만주와 한반도 등에서 상실한 영향력을 회복할 속셈으로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다시 열자고 촉구하였다. 우여곡절 끝내 전쟁법규협의를 주 의제로 다시 헤이그에서 45개국이 참여하는 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러일전쟁의 휴전을 중재했던 미국이 이제는 너무 커버린 일본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어서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복잡하게 각국의 이해가 상충하는 가운데 오직 자국의 국익만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이름뿐인 ‘평화’를 간판으로 모인 국제회의가 약소국의 독립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고종 황제는 이미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뒤라 몰래 특사를 파견하게 된 것이다. 조선은 1905년 9월에 주최국인 러시아의 추천을 받은 주관국인 네덜란드로부터 공식적으로 12번째 초청국이 되었지만 11월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게 된다. 초청장의 효력은 상실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종 황제는 일본에 적대적인 러시아가 주최국이라 그만큼 러시아가 회의를 주도할 것이다라는 판단 아래 러시아의 도움으로 1905년 11월 한일조약에서 빼앗긴 주권(외교권 이양)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3명의 특사를 헤이그로 보내게 된 것이다.

▲ 이위종 특사의 인터뷰 기사, ‘만국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 1907.07.05.일자,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 러시아에 뒤통수를 맞는 특사단

이준과 이상설은 일본의 눈을 피해 러시아의 편의를 받으며 육로인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대한제국 러시아 공사관 3등 참사관) 특사가 합류하였다. 1907년 4월 22일 이준 특사가 서울을 출발하여 64일이 걸려 헤이그에 25일 도착했지만 6월 15일 개회식이 열흘 지난 뒤였다. 대한제국대표단은 입장할 수 없었다. 이유는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협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기에 더 이상 대한제국에는 외교적 대표권이 없다는 일본의 주장을 참가국들이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일본이 동양국가로서 처음으로 서양의 패권국인 러시아를 꺾었기 때문에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유럽 국가들도 일본을 더는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주최국 러시아는 특사단의 입장을 변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 문제를 미끼로 일본과 뒷거래를 하였다. <계속>
/한병훈 목사
– 오스트리아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 칼럼니스트
– 공저 :『 Dokdo und Ulleungdo(독도와 울릉도, 동북아의 키워드)』
– 비엔나 거주

※이 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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