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이야기] 교회와 민족을 위해 독신으로 평생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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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효덕(李孝德, 1895-1978)은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삼화리에서 평범한 농민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정이 일찍 기독교를 믿게 되었으며 특히 모친의 신앙과 교육에 대한 열성으로 삼화교회 목사의 가정에 기숙하게 하였다. 그 후 평양 광혜병원 전도부인 댁에 기거하며 정진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승의여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고향교회가 운영하는 소학교 교사로 있으며 교회전도사 일을 하다가 모교인 평양 숭의여자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는 교사로 있으면서 숭의여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위하여 지하운동을 하는 여성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는데 소나무와 대나무를 합한 뜻으로 ‘송죽회(松竹會)’라는 결사대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상해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독립운동에 활동하였다. 그 후 평남 강서군 신정면 신정교회 전도부인과 신정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중 3.1운동 독립만세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재판을 받아 13개월을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복역을 마치고 출감하였다.

1920년 4월 출감하였을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이름 모를 ‘죽을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살려주면 주님께 몸을 바치기로 서원기도를 하여 그 후 치유되어 서원대로 1920년 감리교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그 후 학교이름을 ‘협성여자신학교’로 변경되어 제1회 졸업을 하였다. 평양 남산현교회 전도부인으로 시무하였으며, 태화사회관 교무 및 사감으로 근무하다가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 겸 사감으로 근무하면서 전주 YWCA를 창설하였다. 그 후 조만식 선생의 애국운동과 절제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43년 동대문교회 전도부인으로 사역하면서 8.15해방을 맞이했고 6.25때 교회를 끝까지 지켰으며 말로에 정릉에 소재한 여성 안식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8년 9월 15일 8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평생 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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