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한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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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85년 8월 3일 귀국하자 소란했던 대학은 내가 떠난 후 교무처장이던 김수철 교수의 학장 직무대리 체제가 끝나고 한남대학 제2대 학장으로 이원설 박사가 첫 학기부터 취임한 상태였다. 그분은 외국에 있는 교수에게도 신경을 쓰는 것 같았는데 내게도 5월 중순에 편지해 왔다. “…요즘에는 학교의 창학이념 구현을 위한 교직원 세미나도 있었고 도서기증 운동을 통해 교수, 직원, 학생들이 새로운 학풍을 위하여 서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캠퍼스 헌수(獻樹)운동이 일어나 아름다운 캠퍼스 가꾸기에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8월 초에 귀국하실 때까지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 빕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학내에 많은 변화가 생겼고 특히 내가 오던 첫 학기에는 신임 교수가 9월 3일 자 신문에 16명이나 소개되었다. 

이원설 박사를 나는 한남대학에서 이한빈 총장 다음으로 훌륭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과시욕이 과한 게 흠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1951년(25세)에 미국에 건너가 캐이스 웨스턴(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정치학 석사,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61년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34세에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을 비롯해 초대 주미 장학관, 미국 아드리안대 교수를 거쳐 다시 경희대로 돌아와 세계대학총장회 사무총장, 경희대 대학원장, 부총장을 지냈다. 대외 활동도 화려해 코리아헤럴드(The Korea Herald) 칼럼에 계속 기고하고 많은 저서를 내고 있었다. 특히 하가이 연구소(Haggai Institute) 한국 지부장으로 한남대 교수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기도 했다. 

그는 오자마자 해외 각 대학과 결연하고 종합대학 인가신청을 먼저 했다. 그가 제출한 종합대학 인가 신청서는 10월 말에 승격 허가가 나고 대학은 축제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1986학년도에는 한남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이 해가 또 대전대학 개교 30주년이었다. 4월 15일 개교기념일에 교문을 준공해 입구를 아름답게 꾸미고 독수리 상징탑을 세워 제막하고, 정성균 기념비도 제막했다. 8월 말에는 오 학장 때 시작했던 ‘성지관’(채플, 총면적 905평, 1,612석 규모)도 준공했다. 

나는 오 학장과 친하다는 이유로 보직을 맡은 게 없어 학교 행정에서 자유로워 한가한 시간 여유가 있어 귀교한 연말에 장남을 잘 결혼시켰다. 결혼시킨 것이 아니라 그가 결혼한 걸 우리가 곁에서 들러리를 선 것이라고나 할까? 큰애는 보스턴 대학(BU)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통지를 받자 1985년 8월 15일에 댈러스를 떠났는데 여러 항공사를 다 뒤져 가장 저가의 US Air를 $150에 끊었다고 한다. 또 그가 귀국할 때는 보스턴의 하버드에 공부하러 온 이영현 외교관을 공항까지 나와달라고 부탁해 어려움 없이 결혼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영현 외교관은 한국에서 내가 여권과 비자를 신청할 때 외교부에 있던 분으로 내가 중매해서 결혼한 대전 오정교회 목사 아들이다. 내 아들은 도움을 구하는데 물불을 안 가리는, 정말 못 말리는 애다. 그런데 크게 미안하게 된 것은 그 항공기가 저가(低價)여서 5시간 이상 연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애를 잘 대접해 주며 음식 대접뿐 아니라 시내에 방을 얻기까지 여러 차례 재워주기도 했다고 한다. “하나님, 이래도 될까요?”라고 나는 여러 번 되뇌었다. 그렇게 신세를 지고 있는 가운데 장학생이 되었는데 그 한 학기 장학금을 아껴 한국 왕복 비행기 표를 사서 한국에 들어와 결혼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 애다. 아들 하나를 결혼시키려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신붓감을 물색하고 그 부모를 만나봐야 하고 예식장 예약과 예물 교환 등 정신없이 몇 달을 지내도 끝이 안 나는 것인데, 결혼식장은 서울 새문안교회요, 하객 접대는 교회 여전도회가 맡아 주었고, 예물 교환은 최소한으로 끝이 났다. 며느리 가정도 아르헨티나에 이민하게 되어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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