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감정 섞인 충고보다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칭찬과 격려를 하는 사랑(마태복음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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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 잘못을 범했을 때, 냉정하고 혹독하게 질책한다고 해서 말에 권위가 생기고 체면이 세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정신 나갔어? 아이큐가 두 자릿수니?”라고 하면서 듣는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비판한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추락하고 권위를 잃어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존경의 대상에서 멀어진다.

중국의 저명한 교육가인 도행지(陶行知)는 “비판할 때는 방법이 중요하다. 비판은 하나의 예술이다. 비판을 잘 사용한다면 칭찬보다 더 유용하다”라고 했다. 비판은 실망을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주는 가시 돋친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의 중요한 핵심은 사랑으로 바로 잡아 주고, 세워 주고, 시정해 주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함께 발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에 대해 말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충고한다면 듣는 이로 하여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이다.

영국의 행동학자 포터는 “사람들이 심한 비판을 받았을 때, 보통 첫 장면만 기억할 뿐 나머지는 억울해하면서 근거를 찾아 그 비판에 대해 반박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비판을 먼저 하게 되면 전하려고 했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신랄한 비판은 상대방과 했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신랄한 비판은 상대방과 감정적 대립만 조성할 뿐이다. 심하게 비판할수록 권위를 세울 수 있고 자기 권위가 서고 규칙과 제도의 중요성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결과는 그 반대이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어 관계와 상황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자주 잘못한 사람을 고압적인 태도로 대한다. 상대의 반응은 외면한 채 자신의 관점을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갈등만 증폭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합리적인 제안을 한다. 좋은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귀에 좋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하게 뜻을 밝히는 동시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을 하면 효율적으로 자기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가령 잘못했을 때 먼저 칭찬하고 감동을 준 다음 잘못을 부드럽게 이어 말하면,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빨리 깨달아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세탁할 때 따뜻한 비눗물에 때를 불렸다가 세탁기에 돌리면 얼룩이 깨끗하게 지워지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때로는 비판 대신 칭찬으로 상상도 하지 못한 변화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아프리카 바벰바족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독특한 비판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족장은 먼저 그에게 마을 중앙에서 있으라고 명령하면, 모든 부족민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겹겹이 에워싼다. 그리고 그들은 비판 대신 칭찬을 통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깨우친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 든 노인으로부터 시작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동안 부족을 위해 애썼던 크고 작은 일을 들려준다.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하고, 얼굴에는 미소를 띠어야 하는 규칙을 따라 노인들이 말을 다하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말했던 장점과 칭찬을 반복해서는 안 되는 관습을 따라 중년, 젊은이, 어린아이의 순서로 그를 칭찬한다.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칭찬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결심과 다짐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상대방의 허물을 사랑과 관용으로 감싸 주고 이해해 주면 우리도 용서와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겠는지를 여쭈면서 ‘일곱 번 정도면 많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자기 나름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라고 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은 후에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빚 갚기를 독촉하다가 옥에 갇힌 비유를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께 생명을 빚진 자들이다.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되 절대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용서받아야 하고 불완전하며 결점투성이인 존재이므로, 남의 단점을 비판하고 감정 섞인 충고를 하기보다는 스스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방의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 주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용서하며 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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