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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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회 개척자 한석진 목사 ③

평양 감사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 지켜

순교적 신앙 열정, 초창기 교회 설립 원동력  

그는 노방전도를 열심히 했다. 노방전도에는 두 가지 큰 효과가 있었다. 첫째,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었고, 둘째, 평양에 서양 선교사가 왔다는 것을 알릴 수 있었다. 주일 오후에는 주일학교를 개설해 어린이들에게 신앙교육 했고, 주일 밤에는 한 조사의 지도로 저녁 예배를 드렸다. 

짧은 기간에 평양 선교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자 이를 시기한 수구파 세력인 평양 관찰사의 지원을 받아 1894년 4월 감리교, 장로 교인이 수요일 저녁 한 조사와 김창식 전도인 외 몇 사람이 기도회로 모였다. 김창식은 감리교의 첫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4)는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통인(通引) (경찰)이 예배당 문을 박차고 달려들어 한석진, 김창식, 송인서, 최치량, 신상호, 우지룡 외 1명, 7명을 결박해 관찰사 아문(觀察使 衙門)으로 끌고 갔다. 

평양 감사는 “국법을 어기고 서양 사람들의 사교를 전하는 너희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너희뿐 아니라 성내에 있는 야소교 놈들은 한 놈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잡아 죽일 터이니 그리 알아라”하고 호령하며 위협했다. 평양 감사는 한석진 조사에게 “너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고 하나님을 한 번 욕하면 놓아 주겠다”고 말하니 한 조사는 도리어 감사에게 주먹질하면서 감사를 꾸짖으니 감사는 대노 격분(大怒 激憤)했다. 이같이 한석진 조사와 김창식 조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굴하지 않았다. 한 조사와 김 조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마펫 목사는 서울에 있었다. 

감리교 선교사 홀(Hall) 의사가 관찰사 아문으로 가서 잡아 가둔 교우들의 석방을 교섭했으나 평양 관찰사 민병석(閔丙奭)은 그를 상대하지도 않았다. 홀 선교사는 서울에 알려서 고종 황제의 어의(御醫) 알렌 의사와 같이 일하는 스크랜턴 의사에게 알리는 동시에 영, 미 양국 공사에게도 호소했다. 그 결과 고종 황제께서 “내가 허락했는데 그대가 어찌 금하느냐?” 칙명을 내려 한석진, 김창식 두 사람의 석방을 명령했다. 마펫 목사는 이 칙명서를 들고 직접 평양까지 왔다. 

그 후 마펫은 평양으로 내려와 한 조사를 만나 “핍박은 교회가 왕성 하는 기회”라고 하면서 많은 위로를 했다. 두 사람이 풀려난 것은 마펫 목사와 홀 선교사의 희생과 적극적인 활동 그리고 널다리 교회와 술라 청 감리교회의 교인들이 철야 기도한 결과였다. 한 조사는 고문에 시달려 허리를 상해 평생 고생했고, 김 조사는 눈을 다쳤다. 그리하여 홀 의사가 치료해 실명은 면했으나 한눈에 흉터가 남게 됐다. 한석진 조사의 순교적 신앙의 열정은 한국교회 초창기에 교회 설립의 원동력이 됐다. 

청일 전쟁으로 평양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널다리 교회는 한때 모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골로 피난 간 한석진 조사는 그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했다. 황해도 수안군 공포면에 강진교회가 먼저 개척된 것은 한석진 조사가 피난 시 전도한 열매이고 옹진리 교회도 한 조사의 전도로 설립됐다. 황해도 재령에 교회가 설립된 것도 한국교회 역사에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한 조사와 마펫 목사가 전도하는 동안 관리의 몰이해와 핍박 때문에 압박도 당했거니와 민간인들이 너무도 몽매하고 이해가 없기에 민망하고 곤란한 일이 많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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