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2) 평양교회 개척자 한석진 목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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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유력한 간부로 지도적 역할 감당

교인 수 증가로 예배당 건축계획 ‘은혜  감사’

전도 열매는 첫째, 서양 선교사들의 열정이었다. 둘째, 패망하는 나라의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셋째, 국가의 패망으로 민족의 살길을 찾는 데서 얻었다. 마지막으로 전도 인의 열정이다. 1897년 8월 5일 서울 구리개 어비슨 의사 댁에 전국 장로교 ‘미순회’가 모였는데 그곳에서 보고된 기록에는 전국에 예배처소가 101개, 세례교인이 932인, 원 입교인 2,344명, 그 가운데 평양지방의 세례교인이 377명, 원 입교인 1,723명이었으며 지난 11개월 동안 전국의 세례교인이 347명 가운데 평양에서 세례받은 교인이 173명이요, 1898년 평양의 세례교인이 1,050명으로 널다리골교회가 좁아서 그 교인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임시로 집을 얻어서 두 곳으로 나누어 모였다.

특히 토마스 목사를 죽인 사람 중 하나인 박춘권이 마펫 목사와 한석진 조사의 전도로 회개해 그해 가을에 널다리골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후에 영수가 되어 교회를 열심히 봉사했다. 한석진 조사는 열심히 전도했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중요한 모임인 만민공동회 관서지부의 회원이 되었고 그 후 유력한 간부로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널다리골교회는 날로 부흥해 앉을 자리가 없었다. 2부로 예배드렸으나 좁았다. 그래서 1899년 3월 마펫 목사와 한석진 조사는 제직과 상의해 예배당 건축계획을 했는데 그동안 가진 박해와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전도한 결과 교인의 수가 날로 증가해서 새 예배당을 지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개척정신을 가진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셔서 많은 은혜를 베푸신 결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선도(仙道)를 하던 김종섭은 청일 전쟁 무렵 한석진의 소개로 널다리골교회 학당 선생이 됐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주변에서 ‘천주학쟁이’로 알아볼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한석진은 그에게 열심히 전도했으나 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하루는 한석진이 그의 흰 두루마기에 글씨를 쓰겠다고 제안했다. 설마 남의 옷에 글씨를 쓰겠나 싶어 장난삼아 써 보라고 했더니 한석진은 정말 붉은 물감에 붓을 담그더니 김종섭의 두루마기 안자락에 ‘성(聖)’자를 써 놓았다. 한석진은 한문 신약전서 한 권을 주었다. 김종섭은 옷을 더럽힌 벌로 받아 온 성경을 읽었고 그러던 중에 서서히 믿음이 생겨났다. 그 1년 후 교인이 되어 교인들을 지도했다. 

마펫 목사는 한국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서 본국 선교부에 청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때 한석진 조사는 한국인의 손으로 지을 것을 주장했다. 교인들이 헌금하고 주머니를 뒤집어서 있는 대로 바치고, 어떤 교인은 자기 집을 바치고 혹은 토지 문건을 바치고 부인들은 금반지, 은반지, 머리의 다례를 바치고, 많은 성도가 노력했다. 그 연보 액수가 5천여 원이었다. 나중에 선교사의 후원헌금도 2천 원이 됐다. 교인 중에는 목수와 석수장이가 있어서 기술과 시간을 바쳐서 일하기로 하고 어떤 교인은 자기가 직접 가서 좋은 목재를 구해왔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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