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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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 (1)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원산에서 북청으로 행진하면서 한 마을을 지날 때였다. 어떤 모자가 우리를 향해 “김일성 장군 만세!”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다급해서 실수를 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 병사가 그 아들을 사살하는 비극이 있었다. 실수였든, 고의였든 총과 칼을 빼든 전쟁터에서는 해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원산을 점령한 우리 부대는 종전을 앞두고 사병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훈련원을 창설하였다. 1951년 8월 1일 나는 피교육 병사로 선발되어 38선 이남 강원도 묵호로 이송되어 교육을 받았고, 최우수 교육생이 되어 1등 상사로 특진하게 되었다.

우리 1중대는 혜산진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남침으로 힘들게 후퇴를 했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흥남에서 후퇴한 우리 부대가 정비되면서 나는 22연대 1대대 4중대 4소대 중기반장으로 배속되었다. 부대와 함께 양양군 금오리에서 통천 방면으로 이동하는데, 양쪽 산이 너무 높아서 좌우를 둘러봐도 하늘 밖에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는 살아남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곳에서 그 전까지의 정봉덕과 이별하게 되었다.

두 번의 기회

군대는 내 인생을 180도 바꾸었다. 그동안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막연한 자유를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된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기는 했으나 믿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내게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미 내게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었지만, 내가 그분의 부르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던 것이다.

첫 번째 기회는 중학교 2학년 때인 1944년이었다. 친구들 중에 평북 구성에서 온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잘 믿는 친구였다. 그는 검정 표지에 금색으로 꾸며진 사복음서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이 무척이나 멋있게 보여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면서도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밋밋하기만 한 다른 책들과는 달리 그 책은 매우 세련되어 보여서 주변 친구들 모두 그 성경책을 탐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한 도박에 우연히 끼었다가 뜻밖에도 100환을 따게 되었고, 나는 주저 없이 그 돈으로 친구에게서 성경책을 샀다. 다른 그 어떤 책을 얻게 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았지만,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귀엽고 세련된 모양 때문에 갖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성경책을 사자,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이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것으로 오해하여 교회에 가자고 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성경책까지 구입한 마당에 계속 버티기가 민망해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선천북교회에 두 번 따라가 보았지만, 역시 교회는 재미가 없었다. 실컷 졸기만 하다 온게 전부였다.

두 번째 기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학교를 휴학하고 고향에서 잠시 농사일을 거들 때 찾아왔다. 당시 우리 뒷집에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찬욱이라는 이름의 친척이 폐결핵 때문에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병 고침을 믿으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안수를 받곤 했었다. 그는 내가 성경책을 읽지는 않고 그저 만지작거리고만 있는 것을 보고는 교회에 같이 나가자고 했고,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교회를 가기도 전에 찬송가 한 곡을 저절로 배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늘 부르던 찬송이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습관처럼 찬송을 흥얼거리며, 나도 모르는 사이 정서적으로는 믿음과 교회생활을 접하게 되었다. 아마 그 날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찬송을 부르고 있었나 보다. 어머니가 한마디를 하셨다.

“봉덕아, 예수 믿으면 조상들에게 제사도 안 지낸다는데 너도 그럴 거냐? 너는 외아들인데 네가 부모 제사를 안 지내면 니 아버지와 나는 어디 가서 제삿밥을 얻어먹니?”

한순간에 교회를 다닐 마음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당시 어머니는 안방에 신위 비슷한 작은 상여를 차려 놓고 3년 동안 아버지 위패를 모시던 중이었다. 그러니 내 찬송 소리가 귀에 거슬리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의 그 말씀으로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난 주님

그 사건은 내가 군인이던 시절, 죽음의 한복판인 6.25 전쟁터에서 일어났다. 두 번이나 믿을 기회를 주셨는데도 믿지 않았고,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나였기에 이번에는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이기로 작정하신 것이었다.

경기도 현리 북방 김일성 고지에서 중기관포를 배치하러 최전방 고지로 나갔다가 전우가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시편이 붙은 지갑용 신약성경을 주웠다. 나는 수중에 들어온 그 작은 성경책을 틈틈이 읽었다. 페치카 난롯불 옆에서도, 그리고 능선에 굴을 파서 만든 참호 안에서도 그 성경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어떤 마음에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성경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 읽은 글귀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소대의 기재계 배 하사가 자신이 성경을 가르쳐 주겠다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농촌교회의 집사였는데 성경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내 모습에 나의 성경교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 뒤로 그는 나를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었고, 때때로 나를 붙들고 내 믿음을 위해 기도를 하기도 했으며, 군대생활에서 소홀하기 쉬운 기도와 말씀묵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 같은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3소대의 배웅기 중사도 나를 신앙으로 잘 이끌어 주었다. 교회 집사였던 그는 군대에서도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냈던 건실한 신앙인이었다. 또 대한신학교를 다니다 온 10종대 중대장 김홍준 중위도 나를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해 준 고마운 사람이다. 김 중위는 훗날 경기도 오산교회에서 시무하며 제2대 경기 노회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신앙인이었다. 하루에도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되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신앙의 스승들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다.

성경을 읽으며 성령의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내게 한 가지 걸리는 일이 있었다. 바로 술과 담배였다. 술은 전투 중이라 마실 기회가 없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중학생 시절부터 흡연을 해온 나에게 금연만큼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데 그 큰 문제가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 단 일주일 만에 저절로 해결되었다. 나조차 믿을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의 금연은 군대라는 특별한 조직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행위와 연결되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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