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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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날개 찢긴 들오리 한 마리 ①

소년들의 손으로 뭉쳐 완전한 자치제 실시

소년 자치제의 소년들 마을, Boy’s Town

불쌍한 어린이들 위한 아동 낙원 건설이 꿈

작업장서도 함께 어울려 즐겁게 일하게 해

“덕분에 공부하러 미국에도 갔다 왔고, 지금 현재는 대구 Y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광은 형님의 덕이 아니겠어요? 전기를 쓰신다니 그 대목 어디에고 ‘나같은 놈도 황 목사님 덕분에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꼭 넣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김용호 씨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1953년경이 난지도 삼동 소년시의 전성기였습니다. 황광은 형님이 그 피로써 전해 오는 애정 속에 200여 명의 고아들이 똘똘 뭉쳐, 글자 그대로 ‘소년들의 손으로 소년들의 의원과 소년들의 완전한 자치제’를 실시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큰형님에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쓴 다음과 같은 글을 내어놓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들오리 이야기’, ‘생일 없는 소년’도 김용호 씨의 글이다.

‘큰형님에의 추억’

“서대문구 수색 북서쪽 방향에서 한강 상류의 물이 흐르고 있다. 유달리 인상 깊은 것은 수색 굴다리라고 불리워지는 약 30미터 가량의 어두컴컴한 터널이다. 이 굴다리를 지나서 약 15분을 걸어가면 한강 상류의 조용한 물줄기가 두 줄로 갈라졌으며, 그 가운데 생겨난 조그마한 섬이 바로 우리들이 살던 난지도라는 섬이다. 섬의 동쪽이 나루터로 되어 모든 사람들이 입구로 정하여 드나들고 있다.

 난지도 소년촌은 섬 가운데에 ‘참’이라는 형태의 배치로 12채의 동화의 나라 같은 집을 갖고 있으며, 네 교실의 학교, 목장 하나, 매점 하나, 상공부 둘, 교회 하나, 병원 하나 등으로 완전한 작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곳은 고아원이라 부르기보다 소년 자치제의 소년들의 마을, 즉 Boy’s Town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의 원장격인 황광은 선생님(당시는 목사가 아니었음)은 10여 년 간의 고아원 선생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고아원이 주는 좋지 않은 선입감을 없애기 위하여 6‧25동란 당시에는 한국보육원의 교육부장 자격으로 아동시라는 어린이들의 마을을 창설하여 아동의 자치제를 시도해 보기도 했었다. 그의 꿈은 항상 불쌍한 어린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는 아동의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들이 원장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하셨고, 그럴 때마다 우리들을 모아서 원을 그리고 앉게 하시고는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꿈같은 동화의 세계를 펼쳐 주셨다.

그때 해주신 동화가 대부분 책자로 되어 나온 것을 나는 몇 년 후에 읽어보았다. <호루라기 부는 소년> <노래하는 섬> <날아가는 새구두> 등이다. 나는 그때마다 나도 크면 소설가가 되겠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은 차차 그를 ‘형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우리 앞에 위엄을 보이려고 한 적이 없으며, 간혹 우리가 동네 사람들과 패싸움을 하면 그는 우리들과 함께 사무실 마루에 꿇어앉아 조용히 몇 시간씩이나 벌을 받으시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들이 작업하는 마당에서도 함께 어울려 팔소매가 없는 런닝셔츠를 입으시고 밭을 가는 일, 김 매는 일을 노래를 불러 가며, 혹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지루할 줄 모르게 끝을 내주곤 했다.

분명히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는 우리들이 일을 하고 있는 작업장을 뒷짐을 진 채 감독처럼 어슬렁거리거나 일을 안 한다고 야단치시는 일이 없었다. 고아원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뒷짐진 채 감시하며 일을 시키는 데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어떤 고아원은 이로 인해 생기는 반항을 매질로 대치해 결국은 집단 탈출의 결과를 가져오곤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근본적인 잘못은 원생들에게 있다. 그러나 일을 해야만 먹을 수 있다는 그 진리를 교육하는 방법이 제각기 틀리기 때문에 그러한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들이 가장 믿는 형님으로서 인식하게 된 것은 한솥밥을 함께 먹는다는 아주 사소한 일에 정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고아원하면 우선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이 꽁보리밥과 소금에 절인 시래깃국을 연상하게 된다. 정부에서 보조해주는 양곡은 그나마 모자란다는 실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죽을 먹는 것은 예사로 넘기지만, 얼마든지 잘 먹을 수 있는 원장의 입장에서 고아들과 한솥의 밥을 먹는다는 경우는 실천하기도 힘들겠거니와 우리들로선 여간 고맙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저 분은 우리 형님이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잡수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모두의 입에서 자연 ‘형님, 형님’하며 따르게 되었다.

황 목사님은 볼 일로 서울에 갔다 오시는 일이 1주일에 1회 내지 2회가 있다. 그가 돌아오실 시간이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선동한 것도 아니련만 아이들은 강가로 나가 서성대며 황광은 목사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강 건너 외길로 그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면 우리는 우리들의 교가인 ‘참 이치를 위해 주의 십자가(찬송가 375장)’를 합창한다.

약 5분 가량 나룻배가 물위를 스쳐 가까이 오면 그도 함께 노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안되었던 일이지만 황 목사님의 사모님은 한번도 그를 마중하지 못했다. 사모님으로서는 행여 아이들의 기쁨을 흐트릴까 염려해 마중을 못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사모님 역시 얼마나 조심성 있게 그분의 사업을 돕고 있었는지를 지금에서야 느끼고 있다.

지금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하나의 인상 깊은 표정이 있다. 그것은 무슨 일엔가 몹시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운동장 구석에 앉아 있던 때였다.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서 한참 서 계셨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웃지도 성내지도 않은 독특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시며 “우리 바르게 삽시다”하시며 내 어깨를 끌어안고는 아이들 틈에다 섞어 주셨다.

그때 ‘바르게’란 그 뜻은 적합한 표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나는 내 자신이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면 바르게 살자던 그 인자하신 형님의 한마디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때의 그 인상깊은 표정과 목소리를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난지도는 매년 장마철에 접어들면 물난리를 겪는다. 한강 철교의 위험 수위가 오를 땐 이미 난지도는 물 속에 잠겨 버린 후다. 섬 전체를 덮은 뿌연 물은 우리들의 집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덮쳐 온다. 어느 해는 우리들의 정강이까지 물이 불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황 목사님은 침착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신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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