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3)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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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가정예배 드려… 요일마다 기도제목 정해 기도

한식 교회당  ‘장대현교회’, 평양 대부흥 운동 발원지

그는 말년에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벽에 성경을 붙여 놓고 읽을 정도로 기독교에 심취했으며 1911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길선주는 어머니에게도 전도했다. 그의 어머니는 후처였다. 선친의 전처는 그의 이복형 희주를 낳고 안주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후처로 들어와 선주 하나를 낳았다. 그러므로 그는 소망을 선주에게 걸고 살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전도를 받고 “네가 믿는 교를 내가 어찌 마다하겠느냐? 나도 너를 따라 예수를 믿겠다”하고는 그 자리에서 ‘구령삼정주문’을 버리고 예수를 믿었다. 이듬해 그의 부친과 함께 세례를 받았으며, 그 이듬해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내에게도 전도해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다.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합심 기도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져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가정예배에서는 매일의 기도 제목을 정했다. 월요일은 가족을 위해, 화요일은 불신 친척과 불신자를 위해, 수요일은 불신 친구들을 위해, 목요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금요일은 교육기관과 자선단체를 위해, 토요일은 외국 동포와 혁명 유지를 위해, 주일에는 군 내외 교회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다. 

1898년 길선주는 30세에 평양 널다리 골 교회의 영수(領袖)로 피택됐다. 그는  전도에 탁월했다. 교회는 부흥해 1900년 장대현 언덕에 2천 명을 수용할 한식 교회당을 건축했다. 온 성도들이 힘겹게 헌금해 5천 원을 모으고, 미국 선교부에서 2천 원을 기부해 총 7천 원으로 평양 최고의 성전을 지었다. 이것이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발원지 장대현교회였다.

당시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본은 조선을 에워싼 청-일 두 나라의 이권 다툼에서 빚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친로(親露) 정책을 취하는 민비를 살해하고 러시아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려 했기에 러-일 두 나라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이렇듯 강대국들 틈에서 부대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걱정한 길선주는 이길함 선교사와 당면한 국내외 정세에 대해 환담하고, 조선을 포함한 미국의 극동 정책을 파악했다. 당시에 조선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정치·군사적으로는 민족의 비극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길은 민족의 복음화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며, 기독교는 현실적으로 국제무대에 나설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교량이었다. 

길선주가 시무하는 널다리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지금까지 평양에서 민간인들이 그렇게 큰 건물을 세운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이 과연 그런 거대한 건물을 세울 수 있을지 지켜봤다. 1900년 마침내 웅대한 건물이 복음의 전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선교회 본부에서 기증한 커다란 종은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울려 퍼졌다. 

한편, 길선주는 안창호 등 17인이 발족한 독립협회 경성본부에 알려 널다리교회를 평양지회로 인정받아 발족하고 사법부장이 됐다. 협회가 평양 대동관 뜰에서 개최한 민중대회는 평양 관찰사와 부윤을 비롯해 남녀 5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안창호와 길선주가 정치 연설을 해 청중을 감동시켰다. 길선주는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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