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큰 별(星)이 지다… 춘원의 마지막 길 벽초 홍명희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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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말이다. 용서해 줄지 나도 잘 모른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당신의 품속으로 끌어안곤 했던 아버지가 가끔 생각난다고 했다. 

이정화 박사가 ‘춘원 연구학회’ 참석을 겸해 미국서 잠깐 방문했을 때다. 숙소인 서울 시내 YMCA호텔에서 만났다. 여든 살의 노인인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곱고 세련됐다. 그는 한국말이 서툴다고 말했다. 전쟁통인 1952년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다음 내용은 지난 날 조선일보 어느 기자와 직접 만나서 인터뷰한 춘원 막내딸 이정화 박사와의 대담을 몇 가지만 요약해 본다.

– 6.25 때 가족이 이민을 떠난 겁니까?

부산에 피난을 내려와 이화여고를 다닌 뒤 언니와 함께 화물선을 타고 미국 유학을 떠났어요. 국방부에서 일하던 오빠는 휴전이 되고 나서 왔어요.

– 춘원을 ‘친일파’ ‘매국노’로 몰고 간 한국사회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같아 떠난 건가요?

아니요. 우리는 애국심이 있어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자리를 잡게 된거죠. 자식들이 모두 미국에 있으니 어머니 허영숙도 1963년에 건너 왔어요.

– 오빠는 한국에 거의 발길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여섯 살 위 오빠와 두 살 위 언니가 있어요. 두 분은 미국서 한국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별로 오지는 않았어요. 저 같은 건달이나 오지, 여기에 오면 밤낮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되는데(웃음)…. 이건 농담이에요. 오빠는 저를 보내 모든 심부름을 시켰어요.

– 6.25 당시 춘원이 납북될 때 가족이 곁에 있었나요?

6.25 당시 아버지 춘원이 잡혀갈 때 일입니다. 당시 아주 얌전한 어린 인민군이 내무서 직원과 함께 왔어요. 어머니가 인민군 앞에 큰절을 하며 잡아가지 말라고 빌었대요. 그러자 그 인민군이 ‘절하지 마세요. 봉건주의 사회에서 배운 나쁜 풍습이에요’라고 했대요.

이 장면을 아버지가 보고 빙그레 웃으며 ‘부인이 남편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나쁜 풍습이 아니다’라고 했답니다.

– 그게 생이별이 됐군요?

아버지는 집에 잠깐 돌아왔다가 다시 잡혀갔어요. 그것이 마지막 생이별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때 우리 가족도 그 집에서 쫓겨났어요. 지금 서울 효자동의 ‘연정’이라는 한정식 집이 우리 집이었어요.

– 당시 춘원은 왜 몸을 피하지 않았나요?

피신할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는 남편을 살려야 할까, 아들을 살려야 할까를 놓고 오락가락했어요. 아버님에게 도망가라 했다가 나중엔 가지 말라고 했어요.

– 무슨 뜻이지요?

그때 오빠가 인민군에 끌려갈 나이였어요. 집 지하실에 숨어 있었어요. 아버님이 도망가면 집을 뒤져 오빠를 찾아냈을지 몰라요. 엄마의 본능은 역시 아들이었어요.

 – 어머니(허영숙)는 그런 선택에 대해 어떤 말씀을 했나요?

후회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요. 나중에 아버님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미국서 장례식을 행했어요. 어머니는 당신의 생각이 너무 높아서 돌아가신 뒤에야 그 위대함을 알았다 했어요.

함께 살 때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 하늘에서 만나면 착한 부인이 되겠다고 했어요. 생전에 아버님을 많이 구박했지요(웃음). 어머니의 현실적인 눈에는 아버님이 ‘위선자’로 비쳤을 테니까요.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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