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사이판한인장로교회 잘 섬긴 오안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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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안열 목사는 1997년 6월 10일 사이판신학교 교무주임으로 부임했다. 신학교는 사이판한인장로교회 안에 교육공간이 있었다. 교회 협동 선교사로 교회 협력도 하며 신학교 교육에 힘썼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중국 조선족 성도들을 오 목사는 교회 봉고차로 열심히 출석시켰다. 신학교를 다녀간 강사마다 오 목사 부부의 알뜰한 대접과 사이판 관광 안내까지 잘해 드려 칭찬이 많았다. 3년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3대 교육이념인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신앙교육 받은대로 신학교 교육에 열중했다. 사이판한인장로교회 사이판신학교에 3년간 기도와 믿음으로 충성한 오안열 목사는 1999년 9월 12일 조용히 귀국했다. 서울 남문교회 부산 개금교회 부목사로 1년 남짓 시무중인데 사이판한인장로교회 장로님들의 강력한 권면을 받아들여 2001년 2월 4일 다시 교회 선교부 전임 사역자로 시무하게 되었다. 조선족 중심 중국인들 선교설교를 은혜롭게 잘했다. 1974년도부터 미국인 로버트 버키 목사, 홍두표 집사, 합동측 조환 목사 등의 기도로 1979년도 9월 9일에 사이판 커뮤니티교회당에서 30명이 예배 드려 교회가 세워지고 담임목사를 청빙하기로 했다. 제1대 담임목사로 청빙된 김봉래 목사가 1981년 5월 10일 부임하여 21년 4개월 시무하고 2002년 4월 28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이해 6월 9일 제2대 담임목사 청빙공동의회에서 5년간 겪어본 오안열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이해 7월 21일 교인과 당회가 합동측 태평양노회를 탈퇴하고 오안열목사 합신교단으로 가입 결의하고 서서울노회 교회가 되었다. 사이판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가 되려고 온 것이 아님을 말하고 담임목사 청빙을 극구 사양했으나 오안열 목사는 온 교인의 추대로 담임목사가 되었다. 오 목사는 조선족 한족(중국인) 선교에 중점을 두고 선교지에서 선교활동에 열심히 기도했다. 동북 삼성 요령성 흑룡강성 길림성 중국선교에 기도를 쏟았다. 신학교도 10회졸업까지 도우며 한글학교도 잘 도와 주었다. 사이판에 취업나온 우리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귀국했을 때 가족 친지 주변 사람들을 복음화 시키는 열매를 기대하고 오안열 목사는 조선족, 한족(중국인) 선교 교육과 신학교를 통해 중국 선교 교두보 확보에 최선을 다했다. 수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17회 출신 오안열 목사는 사이판한인장로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로 30대 후반에 부임하여 박력 있게 “든든한 기초”, “균형 있는교회”로 교회의 목표를 세우고 그 실천목표를 “선교지에서 선교하는 교회”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 “가정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정” 3가지로 세워 두고 교회 창립 30주년 행사까지 잘 마쳤다. 제2차세계대전 때 일본 군사 요충지였던 사이판은 연합군에 점령 당하고 패망한 일본의 자살 바위가 지금 산과 바닷가에 있다. 그들의 추모비는 세계평화를 위해 일본군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이판 옆 티니안섬에 일본군 공군 본부가 있었다. 이 섬을 점령한 미국 B29비행기가 원자탄을 싣고 날아가 일본 본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던졌다. 패전국 일본은 재기하여 우리나라를 아직도 넘보고 있다. 그들의 단결력은 강하다. 우리도 단결심과 국토방위 애국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이판에 아직도 일본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 광복 후 우리 한국인이 건너가 교회도 많이 세우고 잘 살아가고 있다. 사이판에서는 제일 교세가 큰 사이판한인장로교회(현 신승환 목사 시무)는 오안열 목사의 기도대로 꾸준히 부흥되길 빈다. 2012년 1월 성도들 만류를 무릅쓰고 10년간 시무한 교회를 사임한 오안열 목사는 2012년도 1월 귀국하여 부산 가야로교회에서 잘 시무하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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