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북한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기독교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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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복음 전파과정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 중남부지역에 있는 내륙국가로 남북으로 약 970km, 동서로 와칸 지역을 포함해 1,300km가량 뻗어 있다. 와칸은 북동쪽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을 잇는 약 241km에 이르는 좁다란 회랑(回廊)지대로 남쪽과 남동쪽은 파키스탄과 면해 있고, 서쪽은 이란, 북쪽은 투르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을 경계로 한다. 1979년 구소련군 침공 이후 약 500만 명의 주민이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면적은 65만2천225㎢이다.

인구 4천1,16만8천145명 중에서 주변이 온통 이슬람 국가로 둘러싸인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슬림이 98%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독교인은 겨우 2천명 정도이다. 현재 기독교 인구는 0.05%에도 못 미치고 있지만, 전쟁 후 기독교 신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쟁 이후에 피난민들이 돌아오면서 이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초자연적인 꿈을 꾸면서, 또 아프가니스탄 신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돌아온 것이다. 

이슬람 이전에는 Herat과 Balkh에 크리스천 공동체가 있었다. 대부분이 네스토리안파이었다. 지금도 Afghan rugs에는 십자가 형상을 새기고 있지만 의미는 모르고 있다. 652년 이슬람의 유입과 Timurids가 아프간의 기독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한 이후 1천년간 무교회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855년경 칸다하르 출신의 열심 무슬림이었던 Yahya Baqui는 메카 순례 도중 꿈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경고를 받고, 선교사인 Dr. Karl Pfander를 만나 세례를 받는다. 이 사실을 안 무슬림 과격분자들이 어느 날 밤, 칼로 그의 몸을 여러 군데 찌르는 칼침테러를 가한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Yahya Baqui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을 간증하며 살다가 자연사(自然死)했다.

1906년 Qazi Abdul Karim은 무슬림 판사의 아들이었는데, Quetta의 선교병원에서 일하다가 주님을 만난 후 복음전파에 생을 불사른다. 그는 1906년 칸다하르(Kandahar)에 전도여행을 갔다가 체포되어 예수를 부인하고 이슬람신조(“알라는 유일한 하나님이며, 모하메드는 그의 선지자이다”)를 인정할 것을 요구받지만 거부한다. 이에 70파운드의 무게에 해당하는 체인이 목에 걸려지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채 칸다하르에서 카불까지(300마일) 걸어갈 것을 명령받는다. 그리고 카불에 도착한 후 다시 한 번 이슬람 신조를 고백할 것을 요구받지만, 그는 거절한다. 이에 무슬림들은 그의 왼쪽 팔을 칼로 잘라버린다. 또 한 번 무슬림들은 그에게 이슬람 신조를 고백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또 거절하고, 그 대가로 그는 오른쪽 팔도 잘리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이슬람 신조를 고백하는 것을 거부하였을 때, 결국 그는 목이 잘려 순교하고 만다. 놀라운 사실은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몇몇 무슬림들이 죽음 앞에서의 그의 평안한 빛을 보고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사실이다. 순교의 피가 흘리지 않은 곳이 없지만, 아프가니스탄도 첫 선교 때부터 순교의 피가 있었다. 순교의 피는 절대 헛되지 않기에 복음이 꽃피울 것이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성서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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