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11)

Google+ LinkedIn Katalk +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1)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박태선은 순진하고 선한 교인들에게 “죄가 타는 냄새가 난다”며 덕소에 세운 신앙촌에서 퍼온 생수를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해 팔기도 했고, 안수를 일삼으며 사이비 신앙을 전파시켰다. 그러자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박태선 쪽으로 기우는 상황이 잇따라 발생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교인들을 이단자에게 빼앗길 매우 큰 위기였다. 전도부에서는 교인들에게 바른 신앙과 바른 사회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대도시를 중심으로 천막을 치고 대규모 부흥집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광주, 진주, 인천 등 곳곳을 누비며 학교나 공설운동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때는 가정마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없었고, 또 인정이 넘치던 때라 대형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게 되면 어디든지 수천 명씩 모이곤 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박태선 반대 운동뿐 아니라 전도운동도 겸해 건전하고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힘썼다. 하루에 세 번씩 부흥집회를 가졌으니, 그때 전도된 사람의 수는 그야말로 굉장했다. 부흥회는 대개 일주일씩 열렸으므로 지방 부흥회 일정이 잡히면, 나는 미리 그 지역에 가서 천막을 치고 강사 목사들이 머물 숙소를 준비해 놓는 등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 부흥강사로 이름을 떨친 분들은 한경직 목사, 이기혁 목사, 강신명 목사, 김형시 목사, 김세진 목사, 한병혁 목사 등이다. 부흥회를 통해 전국적인 규모의 전도운동과 바른 신앙을 알리는 홍보운동을 전개했고, 5백 개 무교회 면 개척사업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다. 아울러 문선명이 1954년 5월 1일에 창시한 통일교 문제도 거론했으며, 나운몽 장로가 용문산 기도원에서 벌이는 전도 활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해외에 첫 ‘전도목사’를 보내다

대만에 ‘전도목사’를 파송하는 일도 있었다. 중국의 공산화로 상해 지역에서 대만으로 피난 온 교포들이 많아지자 그곳에 있던 정성원 권사가 그들을 돌보며 전도할 목사를 보내달라고 전도부에 요청했다. 요즘은 해외선교가 무조건 선교부 주관이지만, 당시에는 그 나라 현지인 전도는 세계선교부 소관이었고, 교민들 대상의 교역자 파견은 전도부의 몫이었다. 총회 전도부는 회의 끝에 계화삼 목사를 ‘전도목사’로 대만에 파견하는 동시에 현지에 있던 정성원 권사를 1대 교역자로 세웠다. 이어 2대 계화삼 목사, 3대 홍동검 목사, 4대 김웅삼 목사, 5대 김달훈 목사가 파견되었고, 대북교회, 기륭교회, 고웅교회 등 세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런데 교역자를 파견하니, 선교비 마련이라는 또 하나의 과제가 생겼다. 그래서 제작한 것이 바로 ‘선교달력’이었다. 지금처럼 여러 장이 스프링으로 연결된 근사한 달력이 아니라 단 한 장에 열두 달이 인쇄된 달력이었다. 전국의 교인수대로 만들었으나 수금이 전혀 되지 않아 나는 달력 값을 받기 위해 전국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예장 교회들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이라 마산에 가려고 해도 기차를 무려 열다섯 시간 이상 타야 했고, 삼량진역에서 서너 시간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이렇듯 전국 교회 순례는 멀고도 힘든 여정이었지만, 스물아홉, 서른 살의 나는 힘든 줄 모르고 펄펄 날아 다녔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선교달력은 별 성과가 없어서, 결국 선교달력 제작은 2년 후에 중단되고 말았다. 나중에 여전도회에서 새롭게 선교달력을 제작하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나, 사실 선교달력의 시초는 총회 전도부의 한 장짜리 선교달력이다. ‘선교달력비 수금’이라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러 지역의 교회들을 다니는 과정에서 교회 조직을 알게 되었고, 교회만의 독특한 생리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선교비를 위해 선교달력을 제작하고 판매한 대금을 수금하기 위해 읍소재지 교회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재정 부장과 회계를 대면하며 교회의 실정을 알게 된 것이 그 후 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3년간 계속하여 광장이나 공터에서 연합집회를 시행하면서 노회 중진목사, 장로, 부흥강사 등 많은 지도자들을 알게 된 것도 내게는 큰 자산이었다. 

통합·합동으로 나누어지는 아픔

1950년 9월 24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주의 일을 더욱 힘쓰는자들이 되라’는 표어로 제44회 총회가 개회되었으나, 초반부터 경기노회에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해 6월에 열린 한국기독교연합회 측과 복음주의협의회 측의 갈등이 이어진 것이었다. 회의가 거듭될수록 갈등은 더욱 커져 급기야 서로 멱살을 잡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게 되었고, 결국 일주일의 총회 일정을 다 채우지 못한 채 회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서른 살, 그리고 예수를 믿은 지 겨우 5년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교계 기자들, 직원들과 함께 그 광경을 목도하며 깊은 절망과 회의에 빠졌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사와 장로가 신발을 집어 던지고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러대는 모습은, ‘이곳에 과연 소망이 있을까’ 자문하게 만들었다. 십여 명에 달하던 젊은 직원들과 기자들은 충격을 견디다 못해 당시 대전중앙교회 부근에 있던 시장을 마구 돌아다니다가 비어홀에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며 울분을 토로했었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아는 한 교계에서 공개적으로 술을 마신 첫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에큐메니컬 측과 NAE 측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내가 통합 측에 남게 된 것은 어떤 신학적 신념 때문이 아니었다. 전도부 사무실을 지키라는 전도부 총무 황금천 목사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당시 재정이 탄탄하던 교육부는 제대로 된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도부는 교육부에서 빌려 준 사무실 한 칸을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총회 분열 후 종로2가의 사무실을 사수해야 전통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황 목사는 “정 집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부 직원으로서 이 사무실을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고 물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일주일 후에 답을 드리겠다고 했다. 나를 전도부로 데려와 주신 고마운 분의 말씀에, 그 자리에서 ‘못 하겠다’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교육부 사무실을 지킬 사람은 간사 김암 장로였다. 김암 장로와는 인연이 깊다. 해방의 기쁨과 공산당의 횡포로 인한 불안이 공존하는 가운데 1946년 선천 신민당 당사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남쪽의 방송을 듣던 시절, 당사에는 나 외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김암 장로도 있었다. 십여 년이 지나 총회에서 만났을 때 낯익은 얼굴에 인사를 하고 고향을 묻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무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고향 친구인 그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