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3)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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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교회’ 세워 여성 개방 운동 주도, 해마다 전도대회 열어

성경의 심오한 진리에 감동… ‘기도‧성경의 사람’ 으로 불려

1900년 거의 4년 동안 서서히 시력을 잃어 가고 있던 길선주 영수는 화이팅 (Harry C. Whiting) 선교사의 수술로 실명을 면하고 시력을 다소 회복했다. 그는 수술 후에는 돋보기를 써야 성경을 읽고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 주셨던 것같이 그에게 화이팅 선교사를 보내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 일하시며, 그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는 분이심을 길선주와 화이팅 선교사를 통해 스스로 증명하셨다.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된 길선주는 이듬해인 1902년에 조사(助事)가 되어 황해도와 평안도로 목회 지역이 몇 배 확장됐다. 당시 길선주는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대현교회 전임조사가 되면서 약국을 접어야 했다. 그는 약국을 통해 월 80원을 벌었으나, 조사의 급여는 월 6원으로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즈음 그의 아내 신선행은 선도에 몰입해 가정을 떠나 있었고 집안의 우환으로 약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선도에 전념했으나, 예수 믿은 후에는 생계를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굳건히 하라며 남편을 격려했다.

아내의 위로에 힘을 얻은 길선주는 전도, 교육, 문맹 퇴치의 3대 사업을 실행했다. 개인 전도에 주력해 교인 1인 1명씩 전도해 교회로 인도하게 하고, 구역을 나눠 심방대가 가정 방문을 함으로써 결석자를 권면하게 했으며, ‘부인교회’를 세워서 여성 개방 운동을 주도하고 해마다 전도대회를 열었다. 또 교회 주간 학교를 세워 교회 일꾼을 양성하고, 극빈자들의 자녀들을 위해 야간 학교를 열어 교육사업을 추진했다. 더 나아가 성인 야간 학교를 세워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고, 계절 사경회를 개최했다.

길선주 조사는 이 사업을 위해 교회를 개방했다. 이 계획이 실행되면서 장대현교회는 빠르게 부흥했고, 성도들의 믿음도 강해졌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와  유교적 관습으로 인해 관청과 민중에게 박해를 받았다. 야유와 비방, 폭언, 폭행이 있었으나 참았다. 

특히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규방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외간 남자의 출입이 통제됐다. 가옥도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여성은 하녀라도 사랑채에 갈 수 없었다. 여성에게는 출입도 제한했다. 남성들이 모이는 곳에 얼굴을 내놓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893년 조선의 초기 교회는 완전히 남성들만의 교회였다. 교회가 사랑방에서 모였는데 여성들은 사랑방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오직 남편이나 친척들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했으며, 그 후로도 교회를 다닌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집에서 별도로 모임을 가지며 신앙생활을 했다. 이에 길선주 조사가 선교사와 상의해 평양에 ‘부인교회’를 세운 것이다. 후에 이 교회는 장대현교회와 병합되었다.

길선주 조사는 매일 성경을 읽었다. 기독교인이 되어 조사가 될 때까지 성경 전체를 20회 읽었으며 예언서, 대선지서, 소선지서, 복음서, 로마서, 요한1·2·3서는 각각 50회씩 읽었다. 그는 성경의 심오한 진리에 감동해 성경 안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길선주를 ‘기도와 성경의 사람’이라 불렀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와 밤 10시에 기도하고,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금식 기도와 철야 기도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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