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3)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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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이 받은 하나님 은혜, 값없이 주기 위해 힘써’

민족 구원‧새 희망… 사람들, 하나님 앞 하나로 묶어

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대속하는 마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경륜을 펼치는 과정으로 부활의 전제이며,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필수조건이었다. 또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며, 성령은 자연계와 인간세계에 스스로 내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신다고 믿었다.

길선주 조사의 기도와 말씀 선포,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로 장대현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장대현교회는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주기 위해 힘썼다. 추수감사절에는 농작물과 의류가 교회에 산처럼 쌓였고, 성탄절에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자선사업을 했다. 교회 내외에 빈곤한 200세대를 구제하고, 직업 없는 교인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등 공동체를 위해 일했다. 또 지방에 전도 대원을 파송했고 지역마다 교회를 세웠다. 길선주 조사는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각처의 교회를 살피는 ‘도 조사’ 직을 맡아 지방순회와 전도 여행으로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민족 구원과 새 희망으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묶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구원을 위해 누구든지 나아오라는 그의 감동적인 설교에 사람들은 감동했고, 교회는 계속 부흥했다.

1901년 길선주 조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선교부와 공의회가 평양에 설립한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장로회신학대학의 효시였다. 초대 교장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펫(Moffett,S.A.)이 취임했다. 

1905년 길선주 조사는 영국 웨일즈에서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 서방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새로운 희망과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임이 분명했다. 길선주 조사는 우매하고 미개한 동방을 개발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먼저 교회를 부흥시키는 역사가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1903년 원산의 하디 선교사의 부흥회는 1906년 평양으로 이어졌다. 평양 집회를 본 존스턴 선교사는 장대현교회에서 설교했다. 그해 가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사경회를 인도했다. 그때 김익두는 길선주 조사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집회를 마친 후 길선주 조사는 박치록 장로와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평양의 새벽을 깨우려 시작한 새벽기도회에 성도들이 나오면서 평양의 새벽 4시 30분 새벽기도회가 됐고, 매일 이 시간에 새벽종을 울렸다. 기도하고 모이기를 힘쓴 교인들은 새벽 1시부터 모여 2시가 되면 수백 명이 되었으며, 새벽기도회 시간인 4시 30분에는 500여 명이 모여 통성으로 기도했다. 교인들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 후 전도했고, 이는 참으로 놀라운 역사였다. 

장대현교회는 날로 부흥해 4개 교회로 분립했다. 1903년에는 남문밖교회를 분립해 스왈른 부부와 스눅 선교사를 파송했다. 1905년 12월에는 사창골교회를 분립해 블레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이는 450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1906년 1월에는 세 번째로 산정현교회를 설립하고 편하설 선교사를 파송했다. 1909년 마지막으로 분립 개척한 서문밖교회에는 마펫 선교사가 파송했는데, 2년 만인 1911년에 1천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해 평양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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