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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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이 행복을 아이들에게 주자 ①

어린이들의 부모·형제 되어줘

뛰어난 노래 지도 솜씨 도취돼

직원회서 영어 배움, 늘 기다려져

소외된 사람들 행복 위해 결혼   

아이들은 황 형님을 만나기만 해도 기뻐하고 신나했다. 아마도 어린이들마다 황 형님이 모든 어린이들 중에서 자기를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황 형님이 먼 곳을 걸어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어린이들은 손짓하며 기뻐했다. 황 형님은 어린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형님이 되었으며 때로는 상냥한 어머니와 같은 분이 되어 주기도 했다.

나는 한국보육원 생활 중에서 인상 깊은 일 한 가지는 그곳에는 늘 노래가 있었다는 점이다. 황 형님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악기도 여러 가지를 다룰 줄 아는 분이었다. 그의 노래 지도 솜씨는 너무나 뛰어나서 노래를 가르칠 때는 모든 어린이들이 신나서 도취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노래들은 언제나 보육원에서 불리워져서 늘 어디에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어린이들은 식당에 가면서도 노래들을 불렀고 산책을 할 때에도 노래를 불렀으며, 몇 사람만 모여도 노래를 부르는 그런 분위기였다.

언젠가는 우리들 모두가 하모니카를 배우고 노래를 불렀던 일이 있었다. 음악에 소질이 없는 나도 그때 함께 끼어서 하모니카를 배우고 동요 몇 편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까지 하모니카를 늘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불러보곤 한다.

그 시절 해질 무렵에 젊은 선생님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하모니카 반주로 노래를 하며, 한라산 아래 들판을 마냥 거닐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얼마나 낭만적인 장면인가. 우리 모두는 보육원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저절로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황 형님의 인격과 그의 비범에서 오는 교육의 장이었다고 생각한다.

황 형님은 어린이들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직원 전체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셨다. 황 형님이 권위를 부리는 교육부장이 아니어서 우리들은 마음 편했고 모든 것이 민주적인 바탕에서 이뤄져 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모범적인 모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그때 우리 모두는 영어를 배우고 싶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를 알게 된 황 형님은 직원회가 끝날 무렵이면 영어가 한 문장씩 적힌 종이를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것은 교육부장이 다음 직원회까지 외워 오라고 하는 숙제였다. 그리고 직원회에서는 숙제를 외워야 했다. 계속해서 잘 외우는 사람은 상을 받았지만, 못 외워온 직원이 억지로 외우다 보면 헛소리도 나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모두들 직원회를 기다렸고 직원들은 늘 한 마음이 되어 일할 수 있었다.

황 형님의 관심과 사랑은 한국보육원 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잡일을 맡은 분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옷을 빨고 만들고 하는 아주머님에게까지도 황 형님은 한결같으셨다. 누구를 대하든 황 형님은 차별이 없었다. 꼭같이 사랑하고 한결같이 아끼며 염려하는 가운데 이 큰 대식구는 보람있는 공동체를 이뤄 나갔다.

일요일에는 대식구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성가대도 식구들 중에서 나와서 했고, 기도도 식구들 중에서 돌아가며 했다. 설교는 외부에서 강사님이 오시어 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황 형님이 맡으셨다. 진지한 그의 말씀에는 모두들 은혜를 받았고, 믿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나의 보육원 생활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그것은 어린이들을 너무 사랑해 결혼을 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하던 황 형님과, 나와 같이 보육원에 들어간 김유선 씨와 사랑이 싹트게 된 일이다. 대가족 전체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지니신 황 형님이 사랑을 한다니!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결혼이 이뤄질 때까지 나만 아는 비밀로 지켜졌다.

나는 이들 두 분의 사랑의 편지 배달부 노릇을 하는 아슬기(?)를 맛보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황 형님이 부산에 출장 중인 때였는데, 내게 이름 모를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때 내 약혼자는 일선에서 복무중이었는데, 혹시 약혼자에게 무슨 불길한 일이 아닌가 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그랬더니 안에서 나온 편지는 황 형님이 김유선 선생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도 말이 많고 눈총이 많은 한국보육원 생활이어서 그런 편법을 썼던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장래 행복을 위해 결혼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이분들은 그늘지고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올리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결혼을 약속한 것이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드디어 차원 높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나의 약혼자(지금의 남편)와 늘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이분들처럼 희생을 치를 각오로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와 같은 희생을 치르는 결혼을 원하는 젊은 남자도 여자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 두 분은 서로 잘 고르고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이 두 사람을 짝지어 준 것이라 생각한다. 황 형님다운 그리고 김유선 선생님다운 사랑이요 결혼이었다. 이들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결혼을 하고 남을 위해 물질과 정성과 온 사랑을 다 주면서 행복하게 생각하는 부부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우리는 서로 헤어졌다. 서로 다른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 황 목사님 부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 동안 황 형님은 YMCA, 난지도 보이스 타운에서 책임자로 일하셨고, 새문안교회 교육 전도사 시절에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님이 되셨다. 그 후 보이스카우트 간사장, 대광고등학교 교목, 영암교회 담임목사님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중요하고 어려운 사업을 계속해서 맡아 하셨다.

그런 어느 날 친구로부터 황 목사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때는 우리들 모두가 젊은 때라 별로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그러나 병환은 날로 나빠져 누워 계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부랴부랴 찾아가 뵈었다. 그 때의 만남과 대화가 황 형님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목사님, 너무 일을 많이 하셔서 병이 나셨어요. 이제는 교회 일만 하시고, 다른 일이나 <새벗> 잡지의 일 따위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세요.”

“마땅한 사람이 없어. 미국 가서 공부하고 오신 분들은 모두 학교로 가시니까 마땅한 사람을 구할 수 없어.”

나는 그제서야 사회에는 배운 사람만큼이나 현장에서 뛰어야 하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황 목사님이 그때 전국복음화대회의 큰 일을 준비하는 데서 끝맺음하는 데까지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낸 사실을 기억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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