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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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이 행복을 아이들에게 주자 ③

보이스타운 건설, 김 여사 내조 커

약간의 헌금… 대부분 ‘허영된 자선가’들 

삼동시는 헌신·사랑으로 세워져

난지도 떠나야 했던 원인 함구

김 여사는 필자에게 황광은 목사의 전기를 쓰면서 “저를 높이는 견해를 결코 피력해 주시지 않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하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김 여사의 숨은 내조의 공이 없이 황광은 목사의 보이스타운 건설은 절대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기에 “하지 말라”는 말까지 공개하고 있다. 김 여사는 이런 말로 자신의 현재 심경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제 신앙 양심상 하나님 앞에 죄송할 뿐더러 마르다 콤플렉스에 빠져 바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또는 바리새인 같은 책망을 듣게 살지 않았는가 반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보실까 두렵습니다. 황 목사님이 가신 후 제가 선교회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일이므로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제발 김 목사님이 저를 추켜세우는 일에 동조하시지 말고 저를 뒷자리에 가만히 있게 해주는 것이 저를 생각해 주시는 일이고, 또 하나님 앞에 제가 덜 죄송해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아셨지요?”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삼동시를 찾은 방문객 중에는 당시 정계와 재계의 쟁쟁한 명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기도 하지만, 그런 유력자들이 고아들이 사는 난지도를 찾을 리 없었다. 찾아오는 방문객은 약간의 선교 헌금을 내고 자기들이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었다는 ‘허영된 자선가’들이 대부분이었다.

훗날 인도의 소외당한 백성을 위해 일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는 “소외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들을 정성껏 안아주는 사랑이다”고 말하지 아니했던가. 난지도 삼동시도 재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헌신과 사랑으로 세워졌다.

이런 여러 가지 희생을 무릅쓰고 광은 형 내외가 고아들을 위해 몸 바친 보람도 없이,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거기서 떠나야 할 날이 왔다. 광은 형에 대한 중상 모략이 들어간 것이다.

원래 서울 Y의 현동완 총무는 광은 형을 끔찍이 사랑했고 성자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듯 기대가 컸었다. 현 총무로서는 그럴 만했다. 그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육식 안하기, 금요일 금식하기를 철저하게 지켰을 뿐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사는 황광은의 생활 태도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때문에 현 총무는 광은 형이 하는 난지도 삼동 소년시의 일을 적극 후원해 주어 광은 형이 일하는데 지장이 없게 해주었다. 소년시의 모든 관할은 서울 Y가 직접 담당해 외교는 현 총무가, 내부의 일은 광은 형이 책임지는 것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미련없이 떠납시다”

4년 동안 산이라도 옮길 듯한 젊음의 정력을 쏟아 일한 결과 무척이나 재미있게 그리고 이상적으로 생활이 돌아가게 되었고,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삼동 소년시가 알려져 많은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자연 소년시 살림은 커졌고, 살림이 커짐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모두가 아는 대로 황광은 형은 절대로 누구를 원망하거나 또 나쁘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때문에 난지도를 떠나야 했던 진짜 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아내인 김 여사에게조차도 그는 누구를 평하거나 욕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자세한 내용은 과거 속에 묻혀 버린 셈이다.

실상 필자도 이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은 피할까도 생각했었다. 광은 형이 간 지 30년이 된 오늘에 와서, 그가 생전에 그렇게도 말하기 싫어했던 그 문제를 새삼 꺼내는 것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문제를 파헤치는 데는 대단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 삼동시의 시장을 지냈던 김용호 씨는 “저야 어렸으니 무엇을 알았겠어요. 어른들이 하시는 일을 따랐을 뿐이지요. 그때 돌던 얘기가 있긴 했습니다만”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그 시절 광은 형과 아주 친한 사이로 함께 YMCA에서 일하던, 서울 Y의 원치호 전 총무는 그 당시의 상황을 묻는 필자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때의 상황을 알기야 잘 알지요. 그러나 그 사실이 내 입에서 새어 나가는 것을 고인이 좋아할까요?”

고인의 형 황태은 장로의 대답은 이러했다.

“광은 목사가 죽은 다음에 당사자가 와서 눈물로 용서해 주기를 빌었고 나 또한 눈물로 용서해 주었는데, 새삼 지금 와서 또 그 말을 꺼낼 수야 없지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미망인으로부터 온 편지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무 야심없이 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곳을 떠난 것으로 압니다.”

이런 형편이니 필자로서도 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취재 중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지 않는 것은 광은 형의 그 인자했고 상냥했던 웃음이 아직도 우리들 마음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새삼 가슴 아픈 그 말을 꺼내어 그의 얼굴을 그늘지게 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

여기서는 그저 광은 형이 모든 십자가를 홀로 지고 떠나게 된 이유가 Y의 젊은 직원에 의한 농간에 의해서라는 점만 밝혀두는데 그치자. 그 젊은 직원은 현동완 총무에게 광은 형이 난지도 행정을 잘못하는 것으로 보고했다. (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못한다.)

그 보고를 들은 현 총무는 광은 형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런 보고가 여러 번 들어가자 그만 역정까지 내게 되었다.

(총무님께서 내게 대해 유감스러운 점이 있으면 직접 말씀하실 것이지, 내게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시다니!)

광은 형은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 미련없이 나갑시다.”

광은 형의 말이었다. 김유선 여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교회에 진 빚이 있소. 5년만 공부를 하면서 교회를 섬기다가,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른 뒤에 독자적으로 다시 사회사업을 하도록 합시다.”

김 여사로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리 없었다. 지난 4년 동안 남편이 너무 과로한 나머지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고 걱정하던 터이라, 광은 형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이제 더 머뭇거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입은 옷 그대로 몸만 빠져 나왔다. 지닌 것이라곤 책 몇 권과 결혼식 때 선물로 받은 은수저 열 벌뿐이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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