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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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이 행복을 아이들에게 주자 ④

봉급… 자신‧가족 위해 써 본 적 없어

삼동 소년시, 황 목사 떠난 빈자리 커

새문안교회 사택서 소년시 출신 함께해

‘100인 위원회’ 조직, 고아들 학비 부담

새문안교회 부목사

난지도 강을 건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수색에서 서울까지 갈 두 사람의 차비 20원이 없었다. 광은 형은 난지도 삼동 소년시의 책임자로서 Y로부터 월급 몇 푼을 받기는 했었으나, 그는 한 번도 그 봉급을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 돈 10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인복이란 고아에게서 버스값 20원을 꾸었다. 인복이는 미국에 양부모가 계셨기 때문에 특별한 혜택이 있어 얼마만한 돈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그들 내외는 그 돈으로 서울에 왔다. 이제 새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황광은 형이 자기를 모함한 Y의 젊은 직원이나 현 총무에 대해서 유감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니,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생을 마치는 날까지 그는 Y의 젊은 직원과 아무 거리낌없이 지냈고, 현 총무에 대해서는 극진한 편이었다. 뒷날 현 총무에게 집 한 채 사 드리자고 선두에 나서 주선하고 가장 열심히 뛴 것은 바로 광은 형 자신이었다. 자기는 집 한 채 없으면서.

취직 자리가 있었다. 강신명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신 오랜 역사의 새문안교회 교육 전도사 자리였다.

사택을 주어서 집 걱정은 없었으나 봉급을 타기 전이라 첫 달 생활비가 없었다. 그 생활비는 결혼 선물인 은수저 열 벌을 팔아서 충당했다. 그래도 모자라서 김 여사가 애지중지하던, 미국에서 친구가 보내 준 영양학 관계의 책 한 권을 팔아서 겨우 꾸렸다.

이렇게 시작된 새문안교회 생활이 1956년부터 1960년까지 5년 동안 계속된다. 이 동안에 황광은 형은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그는 새문안교회에서 정상적인 환경에서 평범한 환경의 교육을 받는 소년들을 지도하면서 무척이나 보람을 느꼈고 또 재미있어 했다. 따져보면 광은 목사가 정상적인 학생들을 지도하기는 그때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보람을 느끼면서도 그는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역시 불행한 소년들의 친구가 되어야 해.”

황 목사로서는 그런 말을 할 만도 했다. 그가 난지도를 떠나자 삼동 소년시 시민 가운데서 사리분별한 나이가 되고 똑똑하다고 알려진 10여 명의 소년이 그의 뒤를 이어 소년시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종로 2가의 YMCA의 주변을 돌며 다시 야생마의 생활로 돌아갔다. 주먹을 휘두르다가 형무소로 가는 소년도 있었고, 공갈이나 구걸을 하면서 Y주변을 잡초처럼 서성거리는 자도 있었다.

광은 목사는 그들을 모른 체하고 버려둘 수가 없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새문안교회 사택에 소년시 출신 소년 여섯 명을 끌어 들여 침식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들의 앞길을 생각해서 손이 닿는 대로 기관에 취직을 시켰다. 용호는 YMCA, 만간이는 기독교교육협회, 진곤이는 천우사, 종근이는 대성목재, 귀희는 대한산업사, 종구는 철공소에 취직을 시켰다.

그들은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야간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들의 도시락을 매일 싸 주고, 교복을 빨아 풀먹여 다려서 입혀 내보내는 것은 김 여사의 일이었다.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철이 없고 눈치코치가 없었는지…”

그때를 회상하며 김용호 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회가 너희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타락한다면, 너희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삼동 소년시에서 배운 그대로 삶에 자신을 갖고 건강한 생활인으로서 열심히 일하자.”

황 목사는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주기 위해 ‘100인 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 운동에 70여 명의 저명 인사들이 호응해 고아들의 학비를 부담했다.

기독교교회협회의 ‘만간이’

그 무렵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기독교교육협회에서 일하는 만간이는 마음이 착하고 좋은 인상을 주는 소년이었으나, 그 당시에 그는 책임감이 부족하고 허실부실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직장에서 말을 듣게 되었다. 교육협회 간사인 전기주 장로는 황 목사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만간이가 청소를 깨끗이 못하는 데 대해서 불만스러워했다.

어느 날 아침 황 목사는 “나 좀 나갔다 와서 조반을 먹겠소”하면서 만간이와 함께 출근했다. 황 목사는 윗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제치고서, 만간이와 함께 본격적인 대청소를 시작했다. 청소하는 시범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들 두 사람은 청소에 열중한 나머지 출근 시간이 된 줄도 모르고 계속 청소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그만 직원들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어? 황 목사,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전기주 장로의 놀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황 목사는 좀 무안하기도 해서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만간이가 청소를 전보다 잘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전 장로가 황 목사를 향해서 불평스러워하는 말이 없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황 목사가 돈에 대해 너무 지나치리만큼 욕심이 없고 담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워낙 돈이 없는 데다가 교회 부목사로 있는 황 목사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김 여사는 가정부업에 힘써 가정 경제를 보태야 했다. 그러나 사택에서 교역자 아내가 부업을 남의 눈에 띄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몰래 할 수 있는 부업을 찾아야 했다.

그때는 마침 기계편물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김 여사는 그 기술을 익혀서 편물점에서 일을 맡아다가는 밤을 새워 가며 삯바느질을 했다. 때로는 마당에 닭을 40여 마리 키워서 계란을 넉넉히 받아 먹고 가끔은 남에게 선사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때 메추라기 붐이 일어났다.

김 여사는 붐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우연한 기회에 혜화동에 있는 신부 학교를 방문했다가, 뒷마당에서 들리는 이상한 새소리를 듣게 되었다. 호기심이 나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한 신부가 이상한 새를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도 흥미로워서 며칠 동안은 매일같이 가서 구경했다. 결국 그 새가 메추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알이 약에 쓰이는 영양가 높은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새에 흥미를 느낀 김 여사는 그 신부에게 몇 쌍 나눠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좀처럼 응하려 하지 않았다. 1주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찾아가 조른 결과 마침내 메추라기 다섯 쌍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김 여사는 메추라기장을 손수 짰다. 미꾸라지를 사다가 쪄서 말려 사료를 만들어 정성을 다해 길렀다. 50일 동안 길렀더니 메추라기는 드디어 알을 낳기 시작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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