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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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리 선교사 협력, 한국교회에 맞는 찬송가 개발

기독교, 민족의 메마른 정서 기름지게 하는데 일조

길선주 목사는 목회하면서 한국 전통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길선주가 예수를 믿은 후 예배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회중 찬송가의 신선함이었다. 선교사가 부르는 찬송가는 유불선에는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교회 교인들은 서양에서 가져온 찬송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모두 5음계에 맞추어 민요적 가락으로 불렀다. 

또 우리 음악에는 화성 개념이 없었기에 4성부의 찬송가 악보는 무용지물이었고, 찬송가는 모두 단음으로 불렀다. 결국 서양 찬송가는 악보를 무시한 채 모두 한국적 가락으로 자연스레 편곡해 불렀고, 그 편곡자는 회중이었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았으나, 회중은 전국 교회 어디서나 거의 비슷하게 5음계로 편곡된 우리 식의 찬송을 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 선교사와 조선인 지도자들은 점차 전통음악의 요소를 찬송가에 도입해 예배 찬송을 한국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교회의 모든 것이 조선식이었다. 예배당도 한옥, 건물 안팎의 정취도 우리의 정서로 가득했다. 목사 가운이나 교인들의 옷도 한복뿐이었다. 성경 언어도, 설교 예화도, 기도 내용도 모두 ‘우리 예배’의 정체성이 분명했다. 다만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음악만 서양식 노래였는데, 이것을 우리 회중은 주체적 수용 능력으로 전통음악적인 멜로디로 바꾸어 불렀다.

길선주 목사 시절 한국 전통음악을 교회 찬송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사람은 게일(James s. Gale) 선교사였다. 그는 ‘조선음악연구회’를 조직해 조선 교인의 정서에 맞고 잘 부를 수 있는 가락과 가사 개발에 힘썼다. 또 번역 찬송가의 한계를 지적하고, 한국인이 부를 찬송가는 한국 전통음악 가락에 한국인의 시를 붙이자고 주장했다. 

길선주 목사가 예배음악에서 한국 전통음악의 활용을 주장하고 실천한 동기는 자신의 종교적 이력과 체험이었으나 게일 선교사의 영향도 컸다. 길선주 목사는 1909년 자신이 시무하던 평양 장대현교회에 국악 연주자들을 초청해 예배 찬송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의견을 들었고, 교회의 특별한 행사에 국악인들을 초청해 음악과 춤이 있게 했다. 그리고 모우리 선교사와 협력해 한국교회에 맞는 찬송가를 개발했다. 길선주 목사는 기독교가 민족의 마른 정서를 기름지게 할 예술을 개발하도록 했다. 

어떤 소리가 그 이름을 이처럼 떨치는가 / 과연 영계가 콸콸 흘러 내리는 구나 / 바위에 부딪친 장한 기세가 성산을 울리고 / 달빛 어린 화평한 마음은 만리까지 밀고 나가 / 증기는 하늘에 올라 구름을 띄우니 / 인간의 갈증과 수심을 쓸어버리네 / 물고기가 뛰고 갈매기 나는 그 넓은 가슴에 / 나는 춘풍에 낚싯대를 띄우고 싶어라. 

이것은 한상호 목사가 길선주 목사를 두고 읊은 시다. 길선주 목사는 복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특징이 복음과 문화요, 1919년 3‧1 만세운동도 이 두 가지 축이었다. 그는 이 둘의 만남을 위해 노력했고, 이 둘의 융합으로 교회가 민족종교가 되기를 소원했다. 이런 생각은 아들 길진경 목사의 ‘영계 길선주’에 잘 나타났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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