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향기] 자신 위해 살았던 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원장이 남을 위해 살아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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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폐물로 가득한 정맥 같은 삶 버리고 동맥 같은 삶 살고파”

서울 관악구 봉천동이 판자촌인 시절부터 46년간 의원을 운영하며 지역주민을 진료하고 매년 섬마을을 방문해 의료활동과 전도를 이어온 윤주홍 장로를 지난 11월 10일 본보 르비딤홀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봉천동 슈바이처’로 불리는 윤주홍 장로(1934년생, 89세)는 1957년 충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의대에 편입하여 1971년 경찰병원에서 의사로서의 수련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기 위해 원서를 넣고 있을 때에 저는 결핵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해 대학교를 가지 않는다면 군대에 가야했기에 형님들은 저를 걱정하여 집 근처에 있던 충남대학교 국문과에 제 입학원서를 제출했어요. 제 인생의 많은 일들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결핵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았던 윤 장로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그간 몸이 아픈 나만을 위해 살았다. 결국 나도 살리지 못하고 남들에게 신세 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윤 장로는 하나님께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주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명동을 걷던 윤 장로는 가톨릭의대에서 편입생을 뽑는 현수막을 보았고, 연건동, 혜화동으로 발길이 옮겨지며 서울대, 고려대 등 여러 학교에서 의대생을 뽑는 것을 발견했다.

“의대에서 학생을 추가로 뽑는 현수막을 발견한 것부터가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던 듯하다”고 말하는 윤 장로였지만, 원서 접수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문과 출신이었던 이유다. 국문과를 졸업한 것을 확인한 원서 접수처에서는 접수 자체를 반기지 않았다. 이과 전공생만 원서 접수가 가능하다는 명시는 없었기에 다행히 접수는 가능했지만, 그 누구도 합격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주님이 인도하신 일’이라는 자신감으로 입학시험에 참여한 윤 장로는 전문과목 시험에서 기쁨과 당혹감을 한 번에 겪었다. ‘개구리 심장에 대해 약술하라’는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충남 서산 출신이었던 윤 장로는 시골 마을에서 엄청나게 많은 개구리를 만나왔기에 ‘옮다구나 나를 위한 문제로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장에 대해 약술하라는 문장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포기하려던 찰나에 주님께선 ‘시험지에 수험번호라도 써라’라고 하셨고, ‘그럼 이름도 적어야지’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답안지에 글을 써 내려갔어요.”

윤주홍 장로는 의대 입학시험 답안지에 ‘노폐물로 가득한 정맥 같은 삶을 버리고 의사가 되어 동맥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옆에서 고쳐주고 남을 위해 살고자 한다’는 의사로서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한 고백을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할레루야. 아멘.’이라고 적었다.

‘봉천동 슈바이처’

“모든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주셨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신뢰하는 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서도 신뢰받을 수 있게끔 행동하게 하셨어요.”

버스를 타고 봉천동을 지나던 중 타이어 펑크로 인해 버스에서 내려 쉬고 있던 때였다. 개천 건너에 집도 아니고 천막도 아닌 것들이 여러 채 있었고, 그 중 발이 드러나있는 것을 본 윤 장로는 큰일이 난 것으로 생각해 놀라서 뛰어가 문을 열어보았다. 작은 공간이었던 그 곳에는 다섯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 발은 유독 키가 컸던 아들의 발이 삐져나있던 것이었다.

1984년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진료하고 있는 윤주홍(맨 오른쪽)씨의 모습. 아픈 아이의 윗옷을 간호사가 걷어 올리자 청진기로 진찰을 하고 있다. /서울기록원

 

그 때에 윤 장로는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의사로 부르셨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어요. 의사가 되려 했을 때 동맥 같은 사람, 남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던 일이 생각났죠. 그래서 그대로 봉천동에 의원을 개업했습니다.”

윤 장로는 그렇게 1973년 당시 판자촌이었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윤주홍 의원’을 열었고 2019년까지 46년간 아픈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진료비에 연연하지 않고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의 주치의로 살았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럼 예수 믿으세요, 그럼 진료비를 탕감해 주겠습니다’하며 다른 지역의 절반 수준의 진료비를 받곤 했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병원 근처 작은 여관을 얻어 병동으로 사용했던 윤 장로는 주민들을 진료하며 겪었던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입원 후 나중에 진료비를 갚겠다며 없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집에 가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요. 진달래꽃을 따와서 책상에 편지와 함께 놓고 없어지는 사람도 있었죠. 한번은, 맹장 수술 후 퇴원했던 보육원 학생이 중국집 배달로 어렵게 번 돈으로 짜장면 한 그릇을 사서 제게 가져왔던 적도 있습니다. 배달을 하며 어렵게 조금씩 모은 잔돈으로 저를 위해 시골에서 버스 세 번을 갈아타며 저를 위해 짜장면을 가져온 거였어요. 그걸 어떻게 먹겠어요. 같이 앉아서 울었습니다.”

한가지 더 뜻깊은 사연이 있다. 윤 장로가 맹장 수술을 해줬던 여자 아이가 해외에 입양되어 간 후 옛 기억을 감사하며 상자 하나를 보내왔다. 그 안에는 ‘선생님,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잘 나아서 잘 살고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청진기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윤 장로는 “그 청진기를 수년간 가지고 다녔고 너무 오래 사용하다보니 닳아서 끊어지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청진기’라는 수필을 썼고 이 책은 많은 의사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40년간의 섬마을 왕진

윤주홍 장로는 의료혜택을 쉽게 받기 어려운 섬마을을 찾아다니며 수십 년간 왕진을 이어오고 있다.

충남 서산 출신으로 바닷가에서 육지로의 이동이 쉽지 않아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윤 장로는 안면도, 간월도(서산), 내파수도(태안) 고대도(보령) 등 섬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위해 여름 휴가때마다 방문해 진료활동을 이어왔다. 분교에서 혹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진찰하고, 전도했다.

분교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백과사전같은 책을 많이 사주기도 했다. 공부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데려와, 입원실에 재우며 청와대, 공항, 독립기념관, 남한산성 등을 보여주며 체험학습을 시키기도 했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어온 활동이었고, 이는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오랜 동역자인 부인을 비롯한 1남 3녀의 자녀들 역시 그를 전적으로 지지했고 해마다 이 봉사에 함께했다. 모든 것을 함께한 동역자들이다.

나눔의 실천 ‘관악장학회’

그는 1994년 ‘관악장학회’를 꾸려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윤주홍 장로는 “88올림픽 이후 서울이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여전했다”며 “‘많은 이들이 형편에 맞게끔 조금씩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이 장학회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어떤이는 1천 원, 어떤이는 1만 5천원, 어떤이는 100만 원을 내놓는 등 윤 장로를 비롯한 지역주민들이 형편이 되는대로 십시일반 장학금을 모았고, 3억여 원의 기금으로 장학회를 시작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이 장학회는 현재 약 7억 원의 기금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까지 2천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 장학금을 받았다.

“처음 장학회를 시작할 때 주민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장학금을 만들면 있는 사람들도 장학금을 주게 될 것’이라는 말이 대다수의 주민들을 동참하게 했습니다.”

이 장학금 수혜를 받았던 한 학생은 윤주홍 장로처럼 되고 싶다며 일부러 과외를 해서 한달에 5만 원 씩 장학기금으로 보내오기도 했다.
이렇게 일평생 봉사와 나눔을 실천해온 윤 장로는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 제11회 서울시민대상, 56회 청룡봉사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이 각박할수록 인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이웃과 사랑을 나눠야 한다. 그리고 봉사는 남을 돕는 것이며, 없는 것도 주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가지고 있는 것을 선뜻 내어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어려움 중에서도 주는 것은 나를 내어놓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믿음의 시작

윤주홍 장로는 자신의 신앙의 시작은 20살부터라고 고백한다.

“대학교 1학년때, 친구가 좋은 곳에 가자고 했어요. 뭔지 모르고 따라가보니 전쟁으로 건물이 무너져 천막을 치고 예배드리고 있던 대전중앙성결교회였습니다. 그날은 청년들을 위해 특별집회를 하는 날이었고, 목사님이 전하셨던 메시지가 강하게 마음에 새겨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멋모르고 따라갔던 예배처에서 성령의 붙드심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윤 장로는 아동부 교사로서 아이들을 전도하고, 교회당 청소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해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갔던 윤 장로는, 때마침 비어있던 아버지의 일터에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어머니, 여동생 등 가족들이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다보니 30여 명이 함께 기도하는 ‘인지교회’가 되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윤 장로는 “나는 내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지어주셨으며 귀하게 지어주셨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기뻐하셨으니 그만큼 스스로가 주님의 자랑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우리를 선하게 만드셨으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죄를 지었어요.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산 것이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주님이 지어주신 깨끗한 양심대로 살아가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석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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