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온 걸음 정봉덕 장로 (21)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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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 지급·한국서 교육 기회 제공, 현지인 지도자 육성 진행

한국교회는 민주화의 경험이 있고, 경제적·신앙적 자원을 어느 정도 갖추었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을 도울 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의 경험이 중국과 북한선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선교는 시도를 했다가 중도에 단념을 했고, 북한선교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한아봉사회 창립 회원인 박창빈 목사가 월드비전을 통해 북한 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것이다. 한아봉사회가 그 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박 목사가 그 일을 대신했다고 생각한다.

나눔의 선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네 가지 기본자세를 세웠다. 첫째, 그 나라의 종교에 관한 규정에 따라서 진행하고, 둘째, 한 지역에서 10년 이상 선교하여 신뢰를 형성하며, 셋째, 그 사회의 문화와 분수에 맞춰 계획하고 실시하고, 마지막으로 현장의 생활 문화를 습득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현지와의 관계에서 한아봉사회는 이 기본자세를 지켜왔다. 무엇보다도 현지 사역에서 우리가 가장 조심했던 것은 현지법을 위반하지 않는 것과 어떤 일이든 성령의 역사보다 앞서서 강압적으로 진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 간에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 사람들이 “우리는 예수 믿으면 안 됩니까?” 물어오는 일까지 나타났다.

우리는 장학금 지급과 한국에서의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현지인 지도자를 키우는 일도 진행했다. 미얀마 여성지도자 한 명을 한일 장신으로 초청하여 공부하게 도왔고, 캄보디아 청년 한 명에게도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렇다고 한아봉사회의 사역이 실패 없이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베트남 호치민에서 시클로(cyclo) 구매와 양돈 사업을 했다가 실패를 경험했고, 캄보디아에서는 에큐메니칼 센터를 한아봉사회가 위탁받아 운영하기도 했다가 사람 관계가 어그러져 취소된 일도 있었다.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튼튼한 사역을 이루어갈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초등학교 건물을 지어 주었고, 라오스에서는 라오복음교회 총무와 태국교회의 라오스 선교 담당자와 연결하여 기술직업 훈련 사업과 학교를 시작했으며, 초등학교 리모델링 사업 등을 진행했다. 캄보디아에서는 당시 CCA 국장인 매튜 조지(현재 CCA 총무)의 도움으로 현지 지도자들과 모임을 가진 후 사업을 시작했다. 미얀마에서는 미얀마 교회협의회를 시작했고, 당시 총무, 국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협력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97년 2월 류태선 목사와 함께 중국 운남성 쓰마오(思芧) 지역 위생보건학교에 방문했던 일이다. 애덕기금회 홍콩지부의 서신을 받고 그 지역의 마을 의료인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에 동참한 지 2년째였다. 보건소도 약국도 없는 산간오지 마을에서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치료하고 돕는 일에 애쓰고 있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부교장을 비롯하여 전 훈련생들이 비행장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해 주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한아봉사회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현지 사역을 진행할 때 현지에 한국인 코디네이터를 세웠다는 점이다. 이미 선진국들은 1950년대부터 소위 복음 선교사가 현장에서 철수를 시작해, 국제적으로 ‘선교사’란 명칭이 시대에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동역자의 개념을 살리기 위해 선교사 대신 ‘코디네이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한국인 코디네이터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베트남의 김덕규 목사 경우는, 이미 청주 상당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을 받아 현지에 있는 분을 한아봉사회 코디네이터로 세워 협력 관계를 맺은 것이다. 다른 경우는 캄보디아인데, 염천교회와 연동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긴 후, 1998년 러시아 사할린 선교사로 있던 송준섭 목사가 귀국했을 때 캄보디아 ‘코디네이터’로 파송한 것이다.

한아봉사회 회원은 주로 교회이다. 초대 회장 박종순 목사와 박창빈 목사 그리고 내가 속한 서울노회 소속 교회들의 참여로 시작이 되었고, 그 교회들이 여전히 사역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10만 원씩 돕는 선교 모델’은 박창빈 목사의 제안이었다. 회비를 10만 원으로 하고 15개 교회 정도가 참여하면 좋겠다는 제안으로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창립 4년 만에 교회 회원이 130여 개로 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가 현재는 회원 수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70여 개의 교회 회원과 10여 명의 개인 회원이 한아봉사회 사역을 돕고 있다. 회원 수는 줄었지만 회비와는 별도로 프로젝트를 위한 사업비를 따로 후원하는 교회들이 여럿 등장했고,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사역은 더욱 넓어지고 활발해졌다. 이러한 한아봉사회의 발전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창빈 목사를 이어 이 일에 애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임하는 서경기 목사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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