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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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그것을 계기로 청·일 간의 무력 충돌이 조선에서 일어났다. 특히 평양, 선천, 의주 등 서북 지역은 그 전장이 됐고, 청일 양국 군대에 의해 많은 이들의 가정이 파탄되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살아남기 위해 산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신시의 학당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교육비가 삭감됐고 학당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신시 학당이 어려워지자 그는 또 한 차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가난이 성년이 된 그에게 다시 찾아왔다. 빚은 갚을 길이 없고, 학문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꿈은 사라진 데다, 백발마저 희끗희끗 피어나면서 또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신시 거리는 황량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열여덟 살에 훈장 노릇을 하다 현실에 불만을 느끼고 집을 떠났듯이, 이번에도 그는 집을 떠남으로 그 현실을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렸을 때 집을 떠났던 것과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때는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무작정 가출한 것이었기에 동서남북을 헤매며 다니는 방랑의 길이었으나, 이번 여행은 뚜렷한 목적을 가진 계획적인 가출이었다. 즉, 그는 서울의 마펫 선교사를 찾아갔다.

당시 마펫 선교사도 그보다 여섯 살 많은 30대 청년이었다. 양전백은 뭔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고 현실을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 그를 찾아갔다. 1894년 12월 집을 떠나 험한 길을 걸어서 경성에 가서 마펫 선교사를 만났고 흉금 없이 대화했다. 마펫 선교사는 평양에서 선교하다가 전쟁 때문에 경성에 와 있었다.

전쟁 후 평양으로 돌아온 마펫은 그에게 권서 직을 주었다. 권서는 성경이나 전도 문서를 지고 주로 시골 벽촌과 시장 거리를 다니면서 책을 팔고 전도하는 직책이었다. 앉아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훈장 양전백이 이제는 책을 지고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책을 권하고 기독교 진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 같은 권서 생활은 전통 양반 가문 출신의 양전백에게는 생소했다. 중인 이하 상민들이 하는 장사를 하며 그는 이른바 ‘민중 체험’을 했다. 전쟁의 참화가 지나간 폐허에서 고통받는 민중과 직접 만나고 호흡할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이 땅의 민중이 겪고 있는 고난 역사에 참여했다. 그는 언제나 책을 펴들고 논리정연하게 복음을 전했고, 신앙의 길과 이치를 조리 있게 가르쳤으며, 또 예배의 모범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의 복음 전파가 열매를 맺어 삭주군 읍내 교회(1896)와 철산군의 읍내 교회(1897)가 설립됐다. 그리고 그는 1896년 12월 선교사 위대모(魏大模, Nirman C.Whittemore)의 조사가 됐다. 그는 위대모 선교사와 함께 철산군 평서교회를 설립했다(1898). 1902년 양전백은 선천북교회(선천읍교회가 이름을 바꾸었음)의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제1회 졸업생이 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 됐다.

선천(宣川) 개척자

1896년 새로이 평양에 부임한 휘트모 선교사가 평북지역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양전백은 그의 조사가 됐다. 이때부터 양전백은 그와 함께 선천에 기지를 두고 강계, 철산, 정주, 삭주, 곽산, 의주 등 평북 전 지역을 돌며 전도하면서 교회를 세웠다. 각지를 돌며 전도에 힘쓴 결과, 1898년 12개 교회에 세례교인 53명이었던 것이 1899년에는 26개 교회에 세례교인 202명으로 증가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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