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선교사] 아! 코리안 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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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 간 지 2년쯤 지났을 무렵인 1984년 어느 날이었다. 월드컵 국제본부가 있는 미국 시애틀에서 사진작가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며칠간 나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떠났다.

1986년 네팔에서 1차 선교를 마치고 철수할 때 월드컵선 국제본부가 우리 부부를 시애틀로 초청했다. 우리는 유럽을 거쳐 INF의 본부가 있는 영국에 들렀다가 시애틀로 갔다. 갔더니 4박 5일간 특급 호텔에서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무작정 쉬도록 해주었다. 참 멋있는 배려였다. 그리고 5일째 되는 날 본부에 와달라고 해서 갔더니 전 직원이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의 사역에 대해 보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전에 어느 정도 귀띔은 있었으나 그렇게 큰 모임인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그들 대부분이 네팔 현지에서 내가 어떻게 사역했는지 사진을 보아서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당시 내 사역이 그만큼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도 소문이 났는지 포카라에 간 한국의 선교 관계자들이 나에 대해 현지인에게 묻기도 한 모양이었다.

“강원희 선교사라고 압니까?”

현지인들은 처음엔 누구를 말하는가 하고 의아해하다가, 곧 “아, 코리안 닥터!”라고 다들 아는 척을 했다고 한다. 나는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저들을 순수하게 품어주고 섬겼을 뿐이다. 아픈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도를 만나 버려진 사람 같았고, 그저 불쌍하기만 했다. 그런 그들을 돕고 싶어 그냥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그렇게 일하는 나를 보고 네팔 사람 가운데 예수를 믿은 사람이 생겨났다. 1984년 초의 일로 기억하는데, 나이가 아들뻘 되는 끼란이라는 남자였다. 기회를 얻어 그에게 전도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신분이 높아(브라만 계급) 예수 믿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내가 생활하는 모습과 수시로 이동진료를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듯했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까지 끊었다. 그러자 그의 친구들이 금세 눈치를 채고 말았다.

“너 예수 믿는구나!”

그러자 끼란은 부인하지 않고 “그렇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예수 믿는 것이 알려져 고발이 되면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고, 공개적으로 전도하는 외국인은 추방을 당하거나 1년 이상 옥살이를 해 야 했다. 그래서 상류사회 사람인 끼란이 공개적으로 예수를 시인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몰려다니던 친구들은 시장이나 군수 같은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 믿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결코 편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 무렵 시청을 새로 건축하면서 조형물로 시계탑을 세우기로 했는데, 그 일을 끼란이 맡게 되었다. 나 같은 외국인들을 많이 아니까 협조를 얻어 시계탑을 세우라고 관료 친구들이 부추긴 것이었다. 평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를 찾아오던 그가 하루는 평소보다 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왔다.

“무슨 일이 있어요? 표정이 왜 그래?”

“시장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공개적으로 시계탑을 책임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돈이 무척 많이 들거든요.”

알아보니 대략 1500달러 정도가 필요했다. 당시로는 거금이었다.

나는 이 일이 잘 해결되어서 주님을 전하는 좋은 기회가 되도록 기도했는데 주님이 길을 열어주셨다. 시계탑 비용을 영락교회 여전도회 강남지회에서 부담하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직접 제작해 항공 화물로 보내주었는데, 배송 비용이 시계탑 비용에 버금갔다. 이 일로 끼란의 위상은 높아졌고, 그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 후 끼란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 라이온스 클럽(1917년 미국에서 세워진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단체)의 회원으로서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의 두 아들은 인도에서 대학을 마치고 2010년 내가 서울에 있을 때 나를 만나러 몇 주간 다녀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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