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선교] 책임자 없는 오판(誤判)의 위험성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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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단서는 또 있었다. 1959년부터 8년간 집 뒤 비석 아래를 은밀한 물건이나 문서를 숨길 장소로 정한 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북한 공작원과 연락을 해왔다는 최을호와 조카들이다. 담당수사관은 실제로 현장을 찾아 비석의 크기를 재는 한편 실황조사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비석에는 놀라운 사실이 담겨 있다. 비석 말미에 비석을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정사(丁巳)년 곧 1977년에 해당하는 강어대황락(彊圉大荒落)과 음력 10월을 나타내는 소춘(小春), 하순을 가리키는 하완(下浣)이다. 곧 1977년 음력 10월 하순에 세워진 비석이었다. 최을호가 비석을 이용해 공작원과 연락을 취했다는 그때 이 비석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2017년 6월 29일 재심에서 최을호와 조카들의 무죄가 선고돼 34년 만에 누명을 벗었으나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찰조사가 진행 중이던 1982년 12월 최낙규는 구치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15년을 선고받고 9년을 복역했던 최낙전은 가석방 4개월 뒤 목을 맸으며, 최을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판결문을 들고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던 큰아들 최낙효는 마을로 내려갔다가 갈대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숨진 채 발견됐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살던 평범한 한 가정의 비극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최낙전은 “내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그곳,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끔찍한 공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간 도살장이다”라고 했다.

“잠을 안 재우려고 조사실에 쥐를 풀어놨어. 쥐하고 같이 있으면 잠이 오겠어?” 수시로 행해진 폭언과 폭력, 손발에 호일을 감고 전류를 보낸 전기고문, 천을 얼굴에 덮은 뒤 물을 들이부어 숨을 못 쉬게 했던 물고문까지 당했다. 영장 없이 40일 넘도록 불법 체포하여 이 모든 고문을 자행한 이는 바로 이근안이었다. “칠성판에 몸을 묶어놓고 그 위에 올라와서 물을 부어댔는데, 물먹은 배 위로 그놈(이근안)이 올라타 물이 역류해 죽을 뻔했다. 이근안이 원했던 것은 단 하나, ‘간첩이라는 자백’이었다”고 하면서 “상세히 얘기하면 내가 또 다치고 너희까지도 다친다”라고 말했던 최낙전은 출소 4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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