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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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마음의 거문고 ①

세상 떠나며… 가족 위해 집 마련 

병실서 슬픔보다 사랑·감사 감격

가장 지혜롭고 강하게 살다 간 삶

설득력·박력, 헌신·사랑 몸소 실천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여보, 우리 병원 가는 길에 냉면집에 들러서 냉면이나 먹고 갈까?”

나는 마음속으로 ‘안 될 텐데’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침에 샤워조차 숨이 차서 못하겠다고 해서 물수건으로 겨우 닦았는데… 뿐만 아니라 아침 식사를 할 때 아래층에서 올라올 때 너무 숨이 찬 나머지 새새끼처럼 가만가만 걸어서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람이 들끓는 식당에 어떻게 갈 수 있담!)

“여보, 아이들이 집에서 기다릴 거에요. 집에 가서 냉면을 시켜다가 모두 함께 먹도록 합시다.”

집에 돌아온 뒤 아주머니는 큰 냄비에 냉면을 잔뜩 사들고 오셨다. 그것이 사랑하던 시동생에게 마지막으로 대접해 드린 음식이 될 줄 어떻게 알았으랴. 

그린파크 호텔에서 귀가하던 날 그는 느닷없이 집을 하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그렇게도 집을 안 가지려던 사람이 오래 앓게 되면서 그의 주장이 없어지는 것일까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태은 장로님이 다녀가신 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에게 집을 사겠다는 이야기를 했소. 아이들에게는 집이 있어야 하겠다고…”

그 말이 어쩐지 서늘한 느낌을 마음에 준다고는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더 생각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그저 아픈 사람을 이 뜨거운 여름에 시원한 집을 사서 편히 쉬게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복덕방에 뛰어갔다. 

마침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집 한 채가 마음에 들었다. 마당도 좀 있었고 우선 시원해 보였다. 나는 집 구조를 약도로 그려서 황 목사에게 설명해 드리면서 말했다.

“집은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지대가 좀 높아서 흠이에요. 당신이 나중에 오르내리려면 힘들겠어요.”

“나는 괜찮으니 어서 황정식 장로님 모시고 가서 집을 봐 달라고 하고 계약하시오.”

이렇게 해서 집을 계약한 사흘 뒤 그는 영영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으니, 아이들을 위해서는 집이 필요할지 모르나 자기 자신은 내 집을 가지고 살고 싶지 않다던 그 말까지 이뤄 놓은 사실에 나는 그저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은 황 목사가 가신 뒤 곧 해약했고, 영암교회에서 우리가 살던 사택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주신 데 대해 다시금 감사드리며 여기에 밝혀둔다.

병상 노트

황광은 목사는 언제인가 이런 설교를 했던 적이 있다.

“미국 사람은 유언을 써서 미리 봉해 놓고 산다고 하는데, 우리 믿는 사람은 무슨 말을 자녀에게 남길 것입니까? ‘잘 믿어라! 믿음이 세상을 이기느니라. 바로 살도록 해라! 이것을 말로 해서 됩니까? 말보다 행동으로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그의 설교대로 그는 형식적인 유언을 남기지 않고 심장마비로 영원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성경 말씀 그대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내게 예비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삶이었기에, 그의 생을 통해서 수많은 유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황광은 목사의 ‘병상 노트’를 음미해 보도록 하자.

병상에서도 ‘내 병처럼 가벼운 병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사랑에 대해서 10년을 설교해 왔지만 이제야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기 시작한다.

‘위를 보고 걸어라! 왜? 눈물이 떨어질까 보아서’-이런 노래가 유행했지만-나는 최근 눈물을 삼키는 버릇이 생겼다. 이 나이에 무슨 눈물을 새삼스레 보일 것인가 해서다. 그러나,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은 나는 그처럼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황 목사는 병실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에 감격해 운 것이다. 병중에 있을 때 베풀어 준 교우들의 사랑과 친구들의 사랑 및 친척들의 사랑에 감격해 그는 그만 울어버린 것이다. 남모르게, 그는 그의 작은 가슴에서부터 흐르는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또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황 목사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가장 어리석고 착하게 산 것 같았으나, 가장 지혜롭고 강하게 살다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황 목사가 간 뒤에 펴낸 ‘황광은 수상집’ 머리글에서 미망인 김유선 여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좋아하던 그 많은 일들, 사랑치 않고는 못 견디던 그 사랑, 어찌 당신이 쉬고 견디십니까? 세상에선 밑지는 생애가 도리어 승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해선 희망 이외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당신이언만, 자신의 손으로 못 만든 설교집, 동화집 그리고 수상집이 나오게 될 때 당신도 기뻐하실 줄 압니다… 

또한 황 목사의 형 태은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는 그 설득력과 박력있는 웅변과 헌신과 사랑을 몸소 행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산 증인 노릇을 하다가 갔다. 내가 코를 닦아주며 길러 낸 동생이지만, 어느 목사님의 설교보다 나를 감동시키곤 했다. 

그를 속속들이 아는 내가 그의 설교에 감동하는 것은 그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언행일치한 진실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짧은 생애에 너무나 많은 일을 하고 갔다. 깜박깜박 생명의 등불이 꺼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는 비관하거나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심장의 고동이 점점 멈추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새롭고 원대한 설교를 했고, 돌아가기 전날 밤까지도 친구와 더불어 이 나라와 교회를 위한 커다란 설계를 하고 있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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