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고통에 대하여”  

Google+ LinkedIn Katalk +

고통 없는 인생은 없다. 육체적 아픔, 정신적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고 수용하는 과정은 동일하지 않다. 인간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인한 고통을 겪고 산다. 원인 모를 지병으로 평생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고와 재난으로 불구의 몸이 되어 고통 속에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심신 이원론이나, 영육의 구분과 같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 안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몸과 마음 혹은 신체와 영혼은 하나의 동일체다. 신체의 질병은 마음도 정신도 고통을 준다. 스트레스성 고통은 신체의 장기를 망가뜨린다. 

두통이 불면증으로 끝나지 않고, 위장 질환이 소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 때문에 받는 심적 고통은 몸과 마음까지 망가뜨린다. 몸, 정신, 그리고 영혼은 하나의 넥서스(Nexus)로 구성되어 있다. 순간의 고통은 피할 수 있지만 고통을 겪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죄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많다. 고통의 원인을 악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어느 신학자는 고통을 악과 동일묶음으로 의미화 하여 신정론(Theodicy)으로 전개시킨다. 그러나 고통이 악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고통 자체가 악은 아니다. 죄의 문제도 그렇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아도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죄가 고통의 원인일 수 있어도, 고통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곧 하나님은 아닌 것과 같다.

고통의 문제, 악의 문제를 죄로 인한 인과론적으로 해석하거나, 형이상학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욥이 고난 받을 때 세 친구들이 와서 고난을 죄의 인과응보로 질타했다. 주석가들은 욥의 고난을 신정론으로 해제하려는 경향이 많다. 

신정론은 악과 고통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을 피고의 신분으로 세우고, 고통 받는 인간을 원고로, 유신론의 옹호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성을 변호하는 재판법정으로 데려간다. 신앙의 법정이 아니라 이성의 법정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세상에 악을 멸하지 않으시는가, 왜 의로운 자가 고통을 받는가, 그리고 악의 시원은 어디인가 등에 대한 논리적 변호이다. 이러한 신정론의 작업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차원에서 다소 유익이 될 수는 있다.

욥은 신정론으로 자기 고통을 이해하지 않았다. 원인 모를 자신의 고난을 탄식했을 뿐이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아도 고난 받을 수 있고, 사회적 악을 행하지 않아도 재앙과 고난을 받을 수 있는 피조물임을 보여준다. 고통의 탄식을 거쳐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실존적으로 인식하는 신앙의 지평이 온 우주까지 확대되었다는 고백이다.(욥 42:1~12) 

그렇다고 고통의 의미가 영적인 인식의 확장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하나님 사랑이며, 치료이며, 고통의 긴 과정은 자신을 더 깊게 성찰하는 교사이다. 성경은 인간의 죄와 죽음과 고통에 대한 일반화된 규범성과 단일화 된 해답이 없다. 내 죄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의 현실은 내 죄의 결과이고, 개개인의 죄악이 전염되어 거대한 사회악이 되어 고통의 사회가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죄와 악으로 제도화 되고 시스템화 된 사회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살아갈 때 죄와 악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죄악을 ‘악의 평범성’이라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통해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거룩한 고통이다. 성경에서 고통의 주제는 다양하고 다층적이며 다의적이다. 

나, 타자 그리고 세상, 여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실존적 삶 속에서 내 고통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과 죄로 인한 개인의 고통과 사회적 악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겠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이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신앙의 예민한 영성은 잃지 말아야 한다. 

권호섭 목사

<한국맹인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