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주기철 목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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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 마음 움직인 설교… 열심‧기도 뒷받침 돼

유일신 사상, 한국교회 큰 획 그은 선각자‧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말씀 신학은 주옥 같은 설교로 열매를 맺었다. 주기철 목사는 다음 주일 설교를 월요일 새벽기도를 통해 구상하고, 곧이어 설교자료들을 수집하여 묵상하면서 목요일에 설교원고를 작성했다. 

이날은 일체 외출도 하지 않았고 교인들의 방문도 삼가도록 광고하고 온종일 설교원고만 작성했다. 

만들어진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계속 기도하면서 거의 암송하다시피 하여 주일 강단에 들고 올라가 힘을 다해 설교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가 힘 있고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심 위에 기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를 강조했고, 자신이 한 번도 새벽기도회에 빠지는 일 없이 기도회를 인도했다.

둘째, 교회 중심의 신학과 신앙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교회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했다. 그에게 교회는 언제나 성스럽고 거룩한 대상이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인 목사는 항상 거룩하고 성스러워야 했다. 

그는 늘 성결한 삶을 추구했고, 목회하던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교우들을 엄격하게 징계해서 교회의 질서를 지켜가려고 애썼다. 

그의 신학은 철저히 교회 우선주의와 교회 일치 신학에 근거했으며, 갈라진 형제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에 바탕한 교회 제일주의였다.

목회자는 교회에 생명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주기철 목사는 교회에서 설교할 것을 끝까지 주장했다. 목회자는 모든 문제를 교회 중심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의 생명이다.

셋째, 절대 유일신 신학과 신앙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은 신앙의 줄기는 유일신 사상이었다. 그는 십계명의 제1, 2계명에서 규정한 “우상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출 20:5)한 그 말씀을 생명처럼 지켰다. 추호도 타협이나 용납 없이 자신의 절대 유일신 사상을 행동으로 실행했다. 

초량교회 시절 주기철 목사는 1929년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반대안을 제출했다. 그는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목사로서 감히 대일본제국의 정책에 정면 도전장을 낸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일본 오사카에 갔을 때 “우리가 일본 사람들보다 발전한 것이 있다면 기독교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신 우상에 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읍시다”라고 역설했다. 동경 집회에서도 “동포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합시다. 선을 행하고 못사는 민족이 없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고 흥왕한 나라는 없습니다. 사신 우상에 절하지 맙시다. 모든 우상을 버립시다”라고 외쳤다. 

이러한 주기철 목사의 절대 유일신 사상은 한국교회에 큰 획을 그은 선각자와 순교자로 청사에 길이 남을 귀한 이름을 기록하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넷째, 고난의 신학과 신앙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 ‘고난을 겪는 주님의 종’으로 살아갔다. 길지 않은 생애에서 그는 아들을 잃고 외동딸을 잃었으며, 또한 젖먹이 어린 것을 남겨 놓고 34세 젊은 나이에 급서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교회에서 목회할 때는 자신과 가족들의 굶주림을 감내하면서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감옥에 투옥된 후에는 모진 고문을 겪었으며, 가족들이 고난받는 것을 그저 보고 있어야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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