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바흐, 불멸의 사랑을 작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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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음악에 있어서 구약성서와 같은 인물이다. 오늘날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받는 바흐는 최고의 신앙인이기도 했다. 그는 1707년 22살의 나이로 결혼하였는데, 상대는 한 살 연상인 마리아 바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였다.

그런데 바흐는 그녀와 결혼하기 2년 전에, 당시 북독일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요 작곡가인 스승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로부터 사위가 되어줄 것을 요청받은 일이 있었다. 그 의미는 북스테후데의 후계자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살던 뤼벡(Lübeck)이라는 도시의 교회법에는 오르가니스트가 세습제였고, 아들이나 맏사위는 대를 이어 오르가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북스테후데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요 오르가니스트였다.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아른슈타트(Arnstadt)에서 뤼벡까지의 거리가 450km나 되었다. 바흐는 돈이 없었기에 무려 20일 동안이나 걸어서 뤼벡까지 갔다고 한다.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북스테후데의 명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바흐는 스승 북스테후데에게서 열심히 가르침을 받았다. 바흐의 실력과 성실함에 감동을 받은 스승은 그를 후계자로 삼고 싶었다. 아들이 없었던 스승의 맏사위가 되는 것은 부와 명예와 지위를 한꺼번에 물려받는 것이었다. 고아로 자라서 가진 것 없고 생활에 쪼들리던 바흐에게는 이 제안이 출세를 위한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바흐는 이 갑작스러운 스승의 제안에 갈등과 고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큰 결단을 내렸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었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기에 바흐는 출세를 위해 그녀와의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스승 북스테후데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승의 곁에서 음악을 배울 수도 없어서 뤼벡을 떠나 마리아가 있는 아른슈타트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바흐가 옳았다. 당장의 출세보다 사랑을 선택했던 바흐는 그 후 마리아의 헌신적인 내조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바흐가 될 수 있었다.

진실한 사랑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바흐를 생각해 본다. 바흐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태어났다면, 처세도 모르는 바보라고 놀림을 받지는 않았을까! 사랑의 모델이 그리운 시대이다.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더 귀하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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