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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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느낄 때 쉬어야… 기회 생기면 최선 다해

‘무슨 일이든 일평생 열심히 다하겠다’ 

필사적인 심정의 간절한 서원기도 드려

필기시험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는데 신체검사가 문제였다. 결핵 환자라는 점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신체검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공군병 89기에 합격했다. 지금도 종합검사를 하면 폐에 흔적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그때 두 번의 엑스레이 신체검사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군 엑스레이 장비가 아주 소형이었던 탓에 잡아내지 못했던 것이리라. 어쩌면 내 ‘빽’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내 기도를 들으시고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빽’ 말이다. 그 덕분인지 공군에 입대한 다음에도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무사통과됐다.

공군 생활은 과연 듣던 대로였다. 콩나물국에 돼지고기 비계 덩어리가 둥둥 떴다. 운이 좋으면 꽁치 몸통도 차례가 왔다. 매일 저녁이면 간식으로 버터가 발린 곰보빵이 나왔다. 나는 무슨 고기가 나오든지 진이 빠질 때까지 꼭꼭 씹어 먹었다. 멸치대가리도 꽁치대가리도 꼭꼭 씹어 먹는 맛이 좋았다. 급식량은 조금 모자라 늘 허기가 졌지만 정확한 시간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지금은 고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가끔 돼지고기 비계 덩어리를 입에 넣고 오래오래 씹어본다. 그때 필사적으로 씹던 비계 맛을 기억해보고 싶어서다.

미제 매트리스가 깔린 침상에서 자고 운동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점점 몸 상태가 좋아졌다. 기초훈련이 끝나고 공군통신학교에 배정되어 6개월 동안 전자통신 과정을 배웠다. 다른 훈련은 거의 없었고 밤늦게까지 주입식으로 전자공학 고급과정을 배우는 것이 일과였다.

내 특기는 레이더 장비 관리 및 정비 분야였다. 그때 공부한 실력으로 지금도 전자정보통신이나 디지털 분야를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통신학교 학생들에게는 벽돌만한 미제 버터가 한 달에 2개씩 특별 부식으로 지급됐다. 그 덕에 건강 상태가 더 좋아졌다. 마치 나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쉬니 결핵은 자연히 완치되었다.

물론 편하기만 한 나날은 아니었다. 공군 통신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은 받지 않았지만 전자통신 과정 교육은 공대 전기과를 졸업하고 입대한 병사들도 따라가기 힘들어할 정도로 어려웠다. 최첨단 전투기, 레이더, 각종 통신 분야 장비를 정비하고 운영하는 요원들을 훈련하는 과정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육과정 중 치르는 시험에서 과락을 하면 기지 보초병으로 가야 했다. 때문에 교육 일과가 끝나고 복습을 해야 했는데,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허락됐다.

나는 이런 생활이 정말 행복했다.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학비 걱정, 먹는 걱정, 자는 걱정 없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니 그렇게 소원했던 대학생보다 낫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 규칙적 생활과 만족감 덕분인지 몸은 완전히 건강해졌다. 기초체력이 다져져 그 이후로 지금까지 심한 감기 한 번 걸린 일이 없다.

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어떻게든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치지만 그래 봐야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무리 안달하고 조바심쳐봤자 처한 환경을 스스로 바꿀 도리가 없고 지쳐갈 뿐이다. 그게 바로 ‘바닥’의 속성이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쉬는 것이다.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불안하고 힘들지만 쉬어야만 여유를 찾는다. 그래야 올라갈 기회가 생길 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서원기도의 결과

공군 병장으로 제대한 후, 나는 ‘맨몸’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형님 댁에서 수개월 동안 살면서 백수로 지내는데 여간 곤란하지 않았다. 걸치고 나갈 변변한 옷 한 벌 없었고 주머니에는 차비도, 점심값도 없었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다.

“저에게 아무 일이나 주십시오. 무엇이든 할 일을 주시면 일평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뒤로는 그렇게 간절한 서원기도를 한 적이 없다. 그만큼 필사적인 심정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순간이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바닥’에 있다고 느꼈던 때였던 것 같다. 백수로 지낸 지가 벌써 몇 달째인데 대체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사회 경험도 없는 젊은이가 취직할 자리란 도통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는 하도 일자리가 없어 독일 파견 광부, 간호사 모집에 대학 졸업생들이 신분을 속이고 지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경쟁이 대단해서 합격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대학을 중퇴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어쩌다 작은 회사에 겨우 취직해서 일을 해봤지만 교통비도 나오지 않을 만큼 수입이 적고 내가 배울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남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이라는 것도 없었다. 공사장 인부 일이라도 있었으면 몸이 부서져라 했을 텐데 그런 일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토목공사나 건축공사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를 맞으며 자전거로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을 봐도 부러웠던 시절이었다. 미래, 희망, 비전과 같은 단어는 사치였다. 당장 입에 풀칠하고 외출할 옷 한 벌이라도 사 입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매달렸다.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아무 일이나 주십시오. 무엇이든 좋으니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주십시오.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일하겠습니다.”

며칠을 기도했을까. 응답은 엉뚱한 데서 왔다.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나이든 여자 전도사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말씀하셨다.

“박 집사님! 주일학교 반사(교사)를 좀 해주세요. 여 선생은 많은데 남자 선생이 모자랍니다.”

내가 집사였던 것은 서울 변두리 교회들에 워낙 젊은 남자가 귀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었다. 서리집사도 투표로 과반을 얻어야 될 수 있었으니 지금보다 더 어려운 일이긴 했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이 대부분 영락교회, 경동교회로만 모이던 시절이었던지라 나는 신촌장로교회 역사 최초의 총각 집사가 됐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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