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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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2)

대구에서 구미까지 (10)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은 위의 지도에서 배위량이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에서 대구-> 동명지-> 칠곡-> 성주-> 해평의 노정으로 대구에서 해평으로 간 것으로 그린다. 그런데 배위량이 24일 아침에 대구 칠곡을 거쳐 동명으로 갔다가 25일 아침에 동명지에서 일기를 쓴 후 칠곡을 거쳐 성주로 갔다가 해평으로 다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배위량이 직접 자신의 일기에 넣은 지도에는 대구에서 상주까지는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만약 배위량이 성주에 들렀다면 자신이 그린 지도에 성주를 거점으로 표기했을 것 같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의 잘못된 지도는 이상규의 오해에 기인한 것 같다. 이상규는 배위량의 1893년 4월 25일 저녁 해평에서 쓴 일기를 잘못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상규의 번역은 지리적인 오해에 기인된다고 본다. 이상규의 이러한 오해는 배위량의 선교여행의 노정에 대한 오해에 기인했다고 본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상규는 배위량이 성주를 실제로 방문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만약 배위량이 성주를 방문했다면 성주에서 해평까지 가는 노정에서 볼 때 인동은 ‘오른쪽’에 있다. 그런데 배위량의 영어 일기에는 ‘우측’이란 언급이 없다. 그런데 이상규는 “We passed Syung Joo and Entong Umnai?? the left”를 “우리는 성주(Syung Joo)와 우측의 인동(Entong) 읍내를 지나갔다”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은 배위량이 성주를 방문했을 것이란 당위성에 무게를 둔 데서 나타난 오해라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배위량이 동명지에서 아침에 일기를 쓴 뒤에 낙동강을 건너 칠곡을 거쳐 성주로 갔다가 다시 낙동강을 건너 해평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도저히 될 수가 없다. 요즈음 같이 교통이 편리하고 양 사방에 교량이 건설되고 도로 사정이 원활해도 하루에 그런 노정을 도보로 여행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배위량이 말을 타고 순회전도 여행을 했으니, 그 노정을 충분히 여행할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배위량은 순회 전도 여행을 하면서 쓴 일기에 말을 타고 간 이야기도 하고 걸어서 간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 배위량과 함께 했던 순회전도 여행단은 배위량, 서상조, 박재용이란 소년과 마부 두 사람이다. 다섯 사람이 말 두 필과 함께 한 달을 여행하는 장거리 여행을 했다. 배위량은 한 달 동안 쓸 엽전을 마련해서 가져가야 했고 한 달 동안 5명이 입을 의복이며 비상 식량, 판매할 책자 등 여행 물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 달을 여행하면서 배위량 혼자 말을 타고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짐들을 각자 짊어지고 걸어서 여행하기 보다는 말 두 마리에 짐을 싣고 모두 걷는 여행을 하면서도 배위량은 말을 타고 가기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바른 이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더욱이 배위량 일행이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을 하면서 하루 통상 여행한 길이 60리 정도 되는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60리면 24km정도 된다. 통상 한 시간에 4km 정도 걸을 수 있으니 배위량 순회 전도 여행단은 보통 여행객들이 걷는 속도로 비슷한 거리의 길을 여행한 것 같다. 더욱이 배위량이 1893년 4월 25일 저녁 해평에서 쓴 일기의 첫머리에 “우리가 잠을 잤던 데서 60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동명지에서 출발하여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해평까지 온다 해도 60리가 훨씬 넘는 길이고 하룻길로 충분히 족하다.
그런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연구진이나, 이상규가 언급한 동명지에서 칠곡(왜관)을 거쳐 성주를 방문했다가 해평으로 오는 여행은 자가용을 타고 여행하는 오늘날에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배위량은 해평에서 쓴 일기에 “오늘 있었던 유일한 사건은 저녁을 먹으러 장 안(Changan)으로 들른 일 뿐이다”고 언급한다. 동명지에서 해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의 오일장을 찾아보니 4월 25일에 오일장이 선 곳은 ‘장천’이 유일하다. 아마도 배위량 일행은 동명지를 출발하여 거친 산지를 지나 장천까지 가서 그곳의 오일장에서 저녁을 먹고 해평으로 간 것 같다.
이렇게 동명지->장천->해평 노정을 상정하고 보니 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의 명확한 노정 그림이 나타난다. 필자도 처음에는 이러한 노정을 찾지 못하여 동명지에서 동명면과 지천면 경계 지역에 있는 청구공원묘지를 거쳐 황학교회에 들러 잠깐 기도한 후 요술고개를 거쳐 낙동강으로 나와 낙동강변을 따라 구미 인동을 거쳐 구미로 들어갔다. 인동에 대하여 배위량이 일기에 잠깐 언급했기에 필자는 정확한 노정을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인동에 들어 간 것만으로도 크게 감격했다.
그런데 배위량의 일기를 자세하게 읽으면서 필자가 지금까지 순례길로 개발하고자 한 길이 걷기 좋고 의미있는 길이지만, 배위량이 원래 걸었음직한 길은 동명에서 장천을 거쳐 해평으로 가는 노정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도 이 노정은 아직 찾고 걷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노정을 상정하고 보니 배위량의 일기에 1893년 4월 25일 저녁 해평에서 쓴 일기가 비로소 이해가 된다. 배위량은 “Since leaving Taigoo we passed Syung Joo and Entong Umnai?? the left”라고 했다. 만약 배위량이 동명-> 장천-> 해평 노정의 길을 갔다면 인동과 성주는 이 노정에서 볼 때 모두 왼쪽에 있다. 그러므로 배위량이 ‘the left’라고 언급한 것이 맞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대구를 떠난 후 우리는 성주(Syung Joo)와 우측의 인동(Entong) 읍내를 지나갔다”란 이상규의 번역 보다 “대구를 떠난 후 우리는 좌측에 있는 성주(Syung Joo)와 인동(Entong) 읍내를 지나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조금 전에도 필자가 언급했듯이 이상규는 배위량이 성주를 방문했을 것이란 개연성에 따라 무리한 번역을 하는 것 같다. 필자의 생각에는 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때 배위량은 성주를 방문하지 않았다. “Since leaving Taigoo we passed Syung Joo and Entong Umnai?? the left”라고 배위량이 과감하게 말한 배경에는 옛 조선 지도를 보고 인동이나 성주가 가까이 있는 지역으로 생각한 듯하다. 동명에서 장천을 거쳐 해평으로 가는 길에서 왜관의 경관(景觀)도 성주의 경관도 육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리고 배위량이 성주를 방문했을 것이란 이상규의 오해는 다음의 배위량 일기 “Syung Joo is said to be a place of considerable size, probabley like Tongnai”에 대한 번역에 있는 것 같다. 이상규는 “Syung Joo is said to be a place of considerable size, probabley like Tongnai”를 “성주는 상당히 큰 지역으로 아마도 동래와 비슷한 것 같다”고 번역했다. 이 번역에서 그의 오해를 볼 수 있다. 이상규의 번역대로라면 배위량이 성주를 직접 방문하고 그것에 대하여 배위량이 직접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배위량이 성주를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란 개연성에 의거하여 보는 필자의 시각에는 “Syung Joo is said to be a place of considerable size, probabley like Tongnai”란 문장이 “성주는 상당히 큰 지역으로 아마도 동래와 비슷할 것 같다고 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볼 때 “Syung Joo is said to be a place of considerable size, probabley like Tongnai”는 배위량은 성주에 직접 가보지 않았기에 성주에 대해서 직접 경험한 바가 없어 잘 모르지만 그가 전해들은 바대로 성주가 동래와 비슷한 규모의 지역이라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상규의 이러한 오해는 그의 학식의 부족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국교회사에 대한 그의 학식과 경륜은 매우 크고 넓다. 그러나 어떤 학자도 인간이기에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까지 모두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곳저곳 모든 지역을 직접 방문하는 것도 상당히 제한된다. 이상규의 오해는 그러한 일에 직접 방문하지 못한데 따른 오해라고 본다. 필자와 같은 역사연구의 초보자는 이상규와 같은 거인이 닦아 둔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의 도움과 역사적인 업적의 도움을 받아 이런 작고 소소한 것들이라도 찾고 돌아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에 소소한 역할이 있고 그것으로 한국교회사에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한 일이다.
다시 정리하면 필자의 생각에는 1893년 4월 25일에 배위량은 성주를 방문하지 않았다. 지리적인 여건상 그리고 시간적으로 볼 때 그가 칠곡군 동명에서 성주를 방문하고 그 후 성주에서 구미 해평으로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될 수 없다. 아마도 칠곡 동명에서 장천까지 가서 장천 장날인 4월 25일에 오일장이 섰던 장천 시장에서 일행과 함께 이른 저녁 식사를 한 후 해평까지 가서 25일 밤에는 해평에서 숙박했다. 그는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던 지도를 구하여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에 사용했을 것이다. 그는 장천에서 해평으로 가는 길에 인동을 왼편에 두고 지나가면서 왼편 더 먼 거리에 성주가 표시된 지도를 보면서 성주가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성주에 관한 언급을 일기에 적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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