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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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다윗이 12지파 전체의 왕이 되는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블레셋의 위기 앞에서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택했을 때, “모든 백성은 왕 만세를 외쳐 불렀다.”(삼상 10:24) 그 후, 사울이 암몬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였다”고 했다. (삼상 11:14-15)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법궤가 있는 곳에서” 사울이 왕위에 오르는 종교 의식을 했다는 의미이고 (화목제를 드렸다), 모든 백성들이 이를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즉,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동의와 지지를 받으며 백성들이 환호하며 기뻐하는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다윗이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의 왕이 되는 과정은 상당히 달랐다.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백성들의 환호 가운데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숙적은 ‘블레셋’이라는 이방 족속이었다. 사울 왕과 세 명의 왕자는 블레셋과의 전투에 출전하였고, 결국 길보아 산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출전하지 않았던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위를 이어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다윗은 그가 속한 유다 지파 단독으로 유다 지파 왕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다윗으로서는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구원(舊怨)이 있기는 했지만, 다윗의 돌출 행동은 사울 왕가의 법통을 인정하는 10지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반역 행위였다. 그러나 점증하는 블레셋의 위협 앞에서, 설상가상으로 이스보셋 왕이 시해당해 죽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북 10지파의 원로 지도자들은 할 수 없이 다윗을 찾아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울이 왕이 될 때와는 달리 다윗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지지와 동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를 지지하는 함성도 없었다. 다만 10지파 장로들만이 있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10지파 장로들을 의미)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나아가매 다윗 왕이…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삼하 5:3)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다윗은 북 10지파 장로들과 ‘언약’을 맺으므로 북 10지파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언약’이란 ‘계약’ 또는 ‘약속’이라는 의미이다. 즉 다윗은 10지파 장로들과 계약을 맺고 왕이 된 것이다. 계약의 내용은 구약에 명기되어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그러나 다윗 왕이 북 10지파를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고 공평한 왕이 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이 ‘계약’은 파기될 수 있다는 단서 조항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모든 백성들의 환호와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오른 사울과 달리, 다윗은 북 10지파 장로들과 계약을 맺음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12지파 전체의 왕이 된 다윗에게 최우선 과제는 유다 지파와 북 10지파의 통합과 화합이었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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