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백발을 날리면서도 지휘봉을 놓지 않은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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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득(鄭福得) 장로님의 선친은 포항 초대교인 중의 한 분이다. 그의 선친은 예배시간 30분 전 반드시 교회에 도착해 찬송과 기도로 예배를 준비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모친 역시 맏 종부로 후손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낸 성경암송의 대가였다. 특히 이들 부부는 이웃과 교회를 직접 돌아보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다했고, 지나가는 길손들에게도 융숭하게 대접하는 관용의 사람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욱이 정복득 장로님의 선친은 자녀들을 큰 도시의 기독교 학교에 보내 교육시켰다. 그래서 정복득 장로님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를 거쳐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49년 정복득 장로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대사관에서 인터뷰할 때 한국이 작은 나라이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하자원도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인과 기독교의 복음을 수출하는 것이라며 요즘으로 말하면 세계 선교를 강조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인턴 생활을 한 지 1년 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급거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귀국하기로 결심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만류했고, 당시에는 전쟁의 추이를 보며 귀국을 주저하는 유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위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하고, 또한 하던 공부도 중단하고 무조건 조국으로 돌아왔다.

특히 정복득 장로님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혼자되신 미국 목사님의 사모님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을 잊지 않고 자신도 받은 은혜와 진 빚을 갚으며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오지인 안동으로 가는 것을 만류했지만 그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안동으로 내려온 그는 안동성소병원에서 근무하며 충성을 다해 안동교회를 섬겼다. 특히 정복득 장로님은 음악을 사랑한 의사였다. 교인들은 고운 음성으로 찬양하고 열과 성을 다해 찬양대를 지휘하던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는 거의 30년 동안 안동교회 찬양대를 지휘했다. 세월이 흘러 백발을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지휘하던 그를 많은 교인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갖고 있다.

은퇴예식 석상에서 정복득 장로님은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매우 짧은 답사를 남겼다. “나를 충성되이 여기사 나를 일꾼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의 선친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6대에 걸쳐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정복득 장로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출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다. 그에게 있어서 85년의 전 생애는 곧 신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정복득 장로님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뇌리에 신앙과 인격은 여전히 살아 있다.

김승학 목사

<안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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