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한남대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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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진 학장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할 말이 없다. 나는 한남대학을 발판으로 나 자신의 유익만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의 하워드패인 대학에 1984년 가을 학기부터 출근하겠다고 약속하고 왔다. 그렇게 해야 나는 영주권을 받고 애들에게도 영주권을 받게 해서 미국 유학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의 야곱을 생각했다. 형의 장자권(長者權)을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고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외삼촌 댁에 가서는 그의 품삯을 속여 가로챘던 야곱 말이다. 나는 당시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83년 6월 내가 한국에 왔을 때 7년 전의 집은 낡아 있었다. 입식 부엌도 아니어서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은행에 이 집을 담보로 빌린 부채가 더 쌓였다. 미국에는 대학 졸업반에 다니는 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송금해야 했다. 대학교수로는 벅찬 일이었다. 우리는 겨울 방학을 기다려서 아내와 같이 미국에 갔다. 되도록 빨리 영주권을 받고 애들 영주권 절차를 밟기 위해서였다. 그 뒤 나는 귀국하고 아내는 거기 머물러 애들을 돌보게 되었다. 

방학을 마치고 홀로 귀국한 나는 더욱 바쁜 나날을 보냈다. 도서관장으로 있으면서 수학 강의 3강좌 야간 2부 대학 수학 2강좌를 맡았다. 도서관장이어서 맡은 직책도 많았다. 교무 위원회, 대학원 위원회, 도서관 위원회, 신앙지도 위원회, 인사 위원회, 체육 위원회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신앙지도 위원은 화학과의 계의돈 박사가 교직원 상대로 LTC(Leader Training Course) 초·중·고급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통역을 맡아 도운 것이 그리되었다, 체육 위원은 운동을 좋아해서 교수들과 함께 테니스를 했는데 그래서 체육 선생이 나를 체육 위원으로 넣은 것이었다. 거기다 교회에서는 청년회를 맡아 달라고 해서 그걸 맡았는데 보통 많은 일이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청년회 성경 공부를 했으며 청년들과 그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 금요일 밤에는 꼭 한 사람씩을 불러 집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또 청년회 헌신 예배 때는 강사 섭외를 했는데 강사가 없으면 내가 설교까지 맡아 했다. 

나는 저녁만 먹으면 쓰러져 잤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인접해 있는 교회에 새벽기도를 빠진 일이 없었는데 한번은 어머님이 나가면서 열쇠를 안 가지고 가셨다. 그런데 5시 반에 새벽기도가 끝났는데 문을 열 수가 없어 벨을 누르지 못하고 피곤한 내가 깰까 봐 한 시간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아침을 준비해야 해서 할 수 없이 벨을 누른 적도 있었다. 아내 없이 그런 어머니의 시중을 받으며 지냈다.

4월 초에 하워드패인 대학에서 다음 학기 출근을 위해 계약서에 서명해 보내 달라는 편지가 왔다. 나는 그 서류를 보내면서 대학은 웅성거리는데 어떻게 하나 하고 괴로웠다. 대학은 종합대학 승인 신청서를 제출하고 있으니 데모하는 학생들에게도 협력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고분고분 말을 들을 애들이 아니었다. 나는 학생들을 설득하고 오 학장을 도와야 했다. 나는 망설였으나 오 학장을 만나 다음 학기부터 일 년간 휴직을 허락해 달라고 조심스럽게 사정했다. 학장이 승인안 하면 안 되는 휴직이었다. 오 학장은 6개월만 연기할 수 없느냐고 말했다. 벌써 약속한 것이라고 애걸하는 나와 꼭 그래야 하겠느냐고 쳐다보던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했다고 성경은 쓰고 있는데 그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마귀, 자기 자신? 그 중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나 자신과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씨름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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