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일 관계, 근신(謹愼)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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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관광국은 2022년 12월의 137만 명 외국 관광객 가운데 한국 관광객이 46만6000명이었다고 발표했다. 이 통계는 한국이 잘사는 나라라는 느낌을 주지만 이젠 한·일 양국이 공존 관계임을 말하는 통계이기도 하다. 실제 일본 곳곳의 유적과 유물 등은 한·일간 공존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5세기 후반의 일본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후나야마 고분에서 9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을 때, 이중 상당수가 백제 유물과 꼭 닮은 것들이었다. 청동거울은 백제 무령왕릉의 것과 비슷했고, 금동관, 금동신발은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이나 전북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은 거의 똑같았다.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테라(飛鳥寺)는 백제 왕흥사가 원형이다. 실제로 아스카테라를 지을 때 백제가 기술자를 일본에 보냈다. 교토 고류지(廣隆寺)에는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83호)을 쏙 빼닮은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나라현 아스카의 다카마쓰<高松> 고분 벽화에서는 한 눈으로 고구려 벽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그토록 우리 민족은 일본을 친근하게 대했다. 

그런데 일본은 침략과 뼈아픈 갈등의 역사를 만들었다. 시모노세키 해안가에는 청일(淸日)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지배를 위한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체결의 분노스러운 공간이 재현돼 있다. 규슈(九州) 나고야 성터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성터가 있다. 이외에도 일본 관광지 곳곳은 한민족의 숨결을 들려준다. 규슈 사가현 아리타(有田)에서는 조선 출신 도공(陶工) 이삼평(李參平·?~1655년)을 만날 수 있다. 충남 공주 출신인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으나 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면서 일본의 대표적 도자기 아리타 도기의 ‘도조(陶祖)’가 됐다. 그가 죽은 3년 뒤 이 마을 사람들은 ‘도잔(陶山)신사’를 만들어 그를 신(神)으로 숭상하고 있다. 1917년에는 ‘도조 이삼평 비’도 세웠다. 한·일간의 역사는 이렇듯 한 방향으로만 흘렀던 게 아니라 교류와 애증의 반복이었다.

1945년 일본은 태평양 해전에서 미국에 대패하자 미국에 무조건 납작 엎드리는 길을 선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창까지 들고 다니며 “미국 놈들 때려죽이자”던 일본 국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미국 전쟁사령관 맥아더를 칭송하는 수십만 통의 편지를 보냈다. 한 시골 노인은 “옛날에는 천황(天皇) 사진을 놓고 아침마다 경배했지만 지금은 미국 맥아더 장군님 사진을 놓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취지의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 등 미군정 당국자들은 이에 오만하지 않고 근신(謹愼)히 대했다. 근신은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을 말한다. 마침내 끊이지 않던 일본 ‘애국지사’들의 테러가 사라졌다. 그 용맹하던 ‘황군(皇軍)’도 미국 점령군에게 총 한 발도 쏘지 않았다. 마침내 1945년 9월 27일 일본인의 신(神)인 히로히토 천황이 주일 미국대사관으로 맥아더를 예방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긴장한 듯한 히로히토의 부동자세와 맥아더의 오만한 듯한 포즈가 대조적이다(오른쪽 사진 참조). 이에 당황한 당시 내무대신 야마자키 이와오는 언론사에 사진 게재 금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이 통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사진에 나타난 천황의 초라한 모습은 많은 일본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긴 했으나 일본 국민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분변(分辨)을 택했다. 그리고 전후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경제대국을 이룩했다.

2023년 오늘 국력 격차가 좁혀지는 한·일 관계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관계가 징용공 문제로 다시 시험대에 섰다. 이 시험대에서 한·일 간의 정절(貞節: Faithfulness) 우열이 판별될 것이다. 이제는 우리는 일본을 다시 한번 백제 신라의 선조들과 같은 근신 자세로 대해야 한다. 상대를 감정·대립적으로만 파악하면 지형(地形)을 모르고 뛰어내리는 낙하산병(落下傘兵)과 같아질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근신을 발휘해야 극일(克日)할 수 있다.

일본의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근대화 성공을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은 패하면 도리어 승전국에 유학을 보냈다.” 일본을 패배시킨 미국에 인재를 유학 보내어, 세계 속에서 일본의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했다는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미국에 패전당한 후 마사오의 근신충고(謹愼忠告)를 받아들여 국가를 다시 일으켰다. 사도바울은 끝없이 권고한다.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善)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절제하며”(디도서 1:8)

김동수 장로

<관세사, 경영학박사, 울산대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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