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이원설 총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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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설 총장은 대학 구성원의 협치를 강조해 기존 위원회에 수많은 위원회를 추가해 교수들의 참여를 독려했으나 내가 보기론 구성원들을 돕기보다는 자기의 지식과 인맥과 스펙을 앞세워 그들을 끌고 가는 힘든 인도자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끊임없이 외국 기관과 자매결연을 했다. 대만의 토지개혁 연구소를 시초로 미국, 독일, 영국, 필리핀, 오끼나와, 중국 등에 있는 명문대학들과 결연했다. 그리고 자주 해외 출장을 했으며 드디어는 부총장을 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는 평소 “바쁜 목사는 나쁜 목사”라고 말하며 집회를 자주 다니며 대형교회를 목표로 하는 목회로 한국 목사는 명상하는 시간이 없어 세계적인 신학자가 없다고 개탄했던 분이다. 그런데 막상 자기는 “바쁜 총장은 좋은 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총장은 밖으로 다니며 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모금 활동을 활발히 하면 되는 것이며 학교 행정은 부총장을 선두로 한 행정팀이 해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엇박자인 듯했다. 그를 뒷받침하는 후속 부대가 없었다. 교육대학원, 중소기업대학원 등을 유치하고 많은 학과의 신설과 많은 학과의 증원으로 대학은 비대해지고 있는데 내실이 따르지 못했다. 

시설 분야는 어떤가? 종합운동장과 노천극장을 준공하고 그 옆에 학생회관 완공, 고시원 역할을 하는 유림관 착공, 법정학관 준공, 중앙도서관 확장 개관, 12층의 공과대학 착공…. 한 임기에 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업무 추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재단의 빈약한 재정 때문에 학교 발전이 더디다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법인에 재단 소유의 학교 주변 토지를 매각해 마련된 자금으로 여러 가지 수익사업을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법인사무처장은 투자에 대해 전문인이 아닌 교수여서 수익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현재 교문 밖에 있는 대학단지(Campus Town) 2동을 조성한 것에 그쳤다. 

문제는 전국 대학에 불어닥친 학원 자율화와 민주화 바람이었다. 학생회, 노조, 교수협의회는 각자 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소위 운동권 시대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교직원 노조였다고 생각한다. 서울 각 대학의 노조 활동에 힘입어 이곳도 1988년 말에는 노조를 결성하고 대학과 단체교섭을 시작했다. 직원들의 근로조건과 생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특히 2대 노조 위원장 때는 전국 대학 노조협의회 정기 총회를 본 대학에서 개최하고 본 대학의 노조위원장이 전국 노조협의회의 부회장이 된 뒤부터는 우리 대학의 노조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고 1991년 3월 말에는 10여 일에 걸친 파업으로 유리한 단체협약을 쟁취했다. 직원의 지위가 격상되자 부차적으로 교수들의 보수도 전국에서 높은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이 노조위원장이 수학과 출신이었다. 총무처장으로 수학과 교수가 임명되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 골칫거리는 교수협의회였다. 교협(敎授協議會)은 대학노조보다 앞서 1987년 말에 결성되었다. 그런데 당시 총장은 교협에서 직선하겠다는 것이 전국 교협의 대세였다. 그러나 본교는 총장 직선제 정관 개정을 위한 투표에 두 번이나 교수들이 반대했다. 이사회에서 총장을 선임하되 교협에서 인준하도록 하고 대신 대학원장과 각 학과 과장은 총장이 임명하지 않고 교협에서 추천한 사람으로 한다는 타협정관을 채택했다. 주인 없는 이사회를 믿는다고 할까 아니면 파벌이 심한 교수들을 불신한다고 할까. 아무튼, 이사회가 총장을 선임하고 교협이 그를 인준하는 정관을 만드는 총회 때 학생회는 교수, 직원, 학생의 합의체를 부정하고 교협이 독주한다고 이에, 불만이었다. 특히 학생회는 총장 인준의 투표장 밖에서 학원 민주화를 외치며 농성을 하기도 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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