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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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순례단의 역사(37)

상주에서 안동까지(12)

만나는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길위의 학술대회>를 준비해 배위량에 대해 소개하는 일을 행하기도 했지만, 배위량순례단은 태생이 배위량이란 선교사를 연구하기 위해 생긴 단체는 아니다. 그가 1893년도에 순회전도했던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어떤 희망으로 걸었을까 하는 관심에서 배위량이 걸었던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순례를 하기 위한 단체이다. 처음에는 한 사람 또 한 사람 이렇게 걷는 중에 만나는 사람들을 순례길로 불러 같이 순례를 하는 가운데, 작지만, 배위량순례단연합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어떤 길로 배위량이 걸었을까? 하는 질문이 대두되었다. 가령 청도에서 대구까지는 어떤 글을 걸었을까 하는 질문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간단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도 팔조령 인근 마을인 안새월인 신촌에서 잠을 잔 후 팔조령을 넘어 가창의 협곡을 지나 대구로 가는 한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130년 전에 어느 길로 해서 대구로 왔는지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하다. 그가 안새월에서 잠을 잔 후 당시 청도와 대구의 통로인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군 이서면 경계상에 있었던 큰 고개인 팔조령 길을 통해 왔는데, 그 옛 팔조령 길은 지금 있는 팔조령 길과 다르다. 옛 팔조령 길은 안새월쪽에서 가창으로 난 고개였다. 그 옛 길은 길이 험해 8개의 조령이란 의미를 가진 팔조령이란 이름을 가진 고갯길이었다. 이서면과 가창면 사이에 있는 산을 넘는 그 옛 팔조령 길을 폐쇄(閉鎖)하고 신작로길로 만들었다. 그런데, 배위량이 걸었던 그 옛 길만을 찾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만 생각한다면 순례를 할 수 없고 그 옛 길을 찾고 복원하는 일에 매달려야 한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단위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나 할 수 있다. 

지금 걷기 열풍이 불어 옛 길을 찾고자하는 열심히 많다. 그래서 영남대로에 대한 연구와 그 글을 따라 걷고자하는 이들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옛 길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런데 대충 옛 대동여지도 등의 지도를 통해 추측은 가능하지만, 옛날에 있다 폐쇄된 길을 찾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옛 길을 자연지형을 따라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사람들이 다닌 길이 자연스레 길이 되었지만, 신작로는 사람이 다니는 길보다는 차가 다니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만든 일이므로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신작로가 생기게 되어 차만 신작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편리한 그 길을 따라 사람들도 다니게 되면서 옛 길이 자연히 잊혀지게 되었고 사유지는 그 소유인의 용도에 따라 변형이 되어 길의 형태로 남아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배위량이 다닌 옛길만 따라 걷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팔조령을 넘어서 가창 땅에 들어가면 좁은 협곡을 통해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30번 국도 딱 한 길이다. ‘나그네’라는 시에서 박목월이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노래한 싯귀처럼 청도에서 대구로 가는 길은 외줄기이다. 박목월을 자신의 이상향을 남도에 두고 있는데, 그는 그 남도로 가는 길을 외줄기로 표현한다. 그런데 청도에서 대구 오는 길도 “길은 외줄기” 딱 한 길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외줄기 길이 아쉽게도 영남대로길, 즉 배위량이 130년 전에 걸었던 길이 아니다. 그 옛날 영남대로 길은 지금은 흔적도 찾기 힘들다. 영남대로 길과 비슷하게 놓여진 옛 신작로 길도 있다가 없어졌다가 하면서 새로 건설된 30번국도로 이어지는 보조 길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청도에서 대구방향으로는 길이 한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청도에서 대구로 오기 위해 30번 국도의 갓길로 걷든지 아니면 등산로를 찾아 산길을 돌고 돌아와야 한다. 30번 국도를 따라 걷는 길은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길임을 그 길을 걸어 본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된다. 그래서 그 길과 병행되게 짧은 구간만이라도 옛 길을 찾아서 작은 길이라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 길을 내어야 될 땅들은 대부분 사유지이므로 그것을 매매한 후 측량하고 고증해 옛 길을 복원하는 문제는 지금 우리의 수준에서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배위량순례단연합은 배위량이 걸었던 길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에 얽매여 길을 찾고 복원하고 길을 건설할 수 있는 시간과 재력과 여건이 안되기도 하지만, 순례에는 목적이 있다. 지금 현재 찾아 걸을 수 있는 길 중에서 배위량과 관련된 거점지역을 우선 찾아 그 거점과 거점을 잇는 길은 가능하면 배위량이 걸었음직한 길을 찾아 걸어야 하겠지만, 그 길이 너무 위험해 걷기 힘들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가장 걷기에 좋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그 길을 따라 순례를 행하고 있다. 

거점지역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거점지역은 필자 나름으로 정한 원칙에 따라 동래, 대구, 상주, 안동, 경주로 정했다. 이 거점지역에서 배위량은 자의든 타의든 이틀 이상 머물렀다. 물론 용궁 등에서도 이틀을 머무르기도 했다. 하지만, 앞에 언급된 다섯 거점지역은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배위량순례단연합이 앞으로 좀 더 재정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면 이 다섯 거점 지역에 숙박시설을 갖춘 순례단수련원을 건설하면 좋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지금은 실행할 실력이 전혀 없어 개략적인 계획만 하고 기도만 하지만, 이 일을 선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기에 우선 한 곳을 어디에 세울지에 대해서 많은 의논을 했다. 토지 값 등의 영향을 생각해야겠지만, 의미와 사용용도 등이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배위량이 순례출발의 원 시발점인 부산 초량으로 가서 배위량이 살았던 집터를 추적해 그 인근에 그런 시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산의 교계인사들과 함께 답사를 가기도 했다. 

배위량과 관련해서 보면 대구도 부산처럼 중요한 거점이다. 1893년 4월 22일에 대구에 들어온 것을 기념해 대구에 배위량 관련 기념관을 겸한 박물관과 훈련시설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지금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너무 미약하지만,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계획하고 시행하는 이 일이 이루실 것을 믿기에 우선 먼저 청도 혹은 안동 인근에 그런 시설을 두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도시 지역은 도지세가 워낙 높게 측정되기에 우리의 실력이 갖추어지면 추진하기도 하고, 우선은 농촌지역에 먼저 그런 시설을 그 지역 기독교연합회와 지자체와 연관하면 건축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그 지역 교계 인사들과 그런 계획에 대해 말하면서 지역을 함께 둘러보기도 헸다. 

청도에 만약 그런 시설을 두게 된다면, 청도에 대한 지역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길이 될 것이다. 청도지역이 이단 사이비와 관련된 지역으로 알려졌지만, 지정학적으로 청도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다. 이서국(伊西國)의 도읍지인 청도는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청도인들은 매우 종교적이다. 청도는 지역이 넓어 산과 강 호수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곳이 많다. 아름다운 청도의 풍경이 감성을 자극한 때문인지 청도출신 오누이 시인인 이호우와 이영도는 아름다운 그들의 문학을 완성했다. 다행하게도 청도기독교총연합회가 열심을 내어 청도기독교회관은 건축하기 위해 대지도 구입했다. 그 대지 위에 기독교 회관이 지어지면 그런 시설이 되어 순례자들에게도 개방이 되면 좋을 것 같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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