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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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어머니와 며느릿감 ③

철저한 금욕주의 고집하며 살아온 삶

클라라 만난 후 생각의 동요 시작돼

일‧사랑 위해 행복 찾고 싶은 모순 느껴 

사랑, 인생의 봄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

무언(無言) 1주일의,

마음은 말해 버리면 우습고 써놓으면 추잡해서 말하지 않고 쓰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그래도 자꾸만 듣고 싶고 또 말하고 싶고 쓰고 싶은 건 웬일인지 모른다.

철저한 금욕주의자! 실상은 말로만 철저했지 내용은 없는 거야. 다 그런 것 같이, 세상이.

그래도 여지껏 뻐개 오던 내 29년의 고집은 어디 갔는지 클라라와의 만남 이후는 괴롭고 귀찮은 이 법률에서 자꾸만 벗어나고 싶으니 웬일일까. 내 의지가 약한 연고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순해서 그럴까.

나는 프랜시스도 아니요 성자도 아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나 자신은 보통 사람이 가는 평탄한 길을 갈 것 같지 않았고, 또 내게는 내가 생각하는 이성이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들(어린이)과 더불어 굴러다니다 일생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젊은 피가 가슴에서 거꾸로 끓어오를 때면 참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클라라를 만난 후부터 내 생각이 퍽 동요하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세 분! 그것은 내게 어느 의미로는 반발적 감정을 느끼게 했던 존재였다. 나는 무식한 사람들의 친구였고, 또 그렇게 최고 학부를 나온 이들과는 도저히 사귈 수도 없고 또 원치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순보(李巡步: 이종환)가 기독학생회를 할 때 나는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백안시했던 인텔리층이 셋이나 함께 몰려 들어오는 것은 내게 어느 의미로는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일종의 경멸의 감도 가지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어린이를 위해 일생을 바칠 사람도 그 중에는 있겠는가. 나는 개별적으로 두어 번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얻어 말해 보았지만 무식하게 금방 뛰어드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낙망했으나 그렁저렁 지내왔었다.

우 씨가 나간다고 할 때에 비로소 내 감정의 줄은 터지고 말았다.

(아, 참 나약한 건 여자로구나. 그리고 내가 보는 대로야!)

이렇게 생각하고 난 후의 내 심정은 여전히 사막을 헤매이는 것 같이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다.

그렇다. 숨길 수 없는 일이나 버리지도 못할 일이면서도 다른 속에서 가만히 싹트고 있는 한 개의 제3 의지는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클라라에게의 접근이다.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믿음직한 그 태도와 또 일본말로 ‘시도야까’(얌전한)한 성격, 내가 떠들고 경하기 때문에 나는 늘 이런 성격을 좋아했던 것이 사실인데, 그가 바로 내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낄 때에 나는 자꾸만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급기야는 오빠가 될 터이니, 그렇게 되어 주겠느냐고 말하기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 말도 퍽 용기를 내서 하려고 했었는데, 어떻게 우물쭈물 되어서 거북해진 때에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분이 아니세요?” 하고 반문하는 데는 그만 부끄러워 나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실상은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게 내 여린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가 시집을 간다면 아마 좀 놀랄 걸? 아니 섭섭해서 못 견딜 거야. 아니 못 살는지도 몰라!

이렇게 마음의 정도가 점점 깊어져 가는 것도 느꼈다. 그렇지만 “난 결혼은 안 해!” 하는 이것만이 늘 강했기 때문에 빠져 나오지 못할 구렁텅이로 자꾸만 걸어 들어가는 느낌으로 매일을 살아오게 된 것이다.

클라라가 이 집을 떠나려고 한다는 의사를 들었을 때 나는 일시에 탑이 무너지는 것 같이 허전했고, 또 그는 그의 갈 길이 있었던 것을 엉터리도 없는 인간이 공연한 공상을 쌓아 본 것이구나 생각되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다 집어던질 생각도 했었지만, 그가 다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들었을 때 나는 무한히 그의 생각을 아름답게 여겼고, 또 어머니가 나와 같이 오래 있어 주겠다는 것만큼 기뻤다.

나 자신을 숨기고 내 양심을 속이고 움트는 이 생각, 이것을 장차 어찌 처리하겠는가가 의문이다. 결국은 일을 위해 몸도 바치고 싶고, 사랑을 위해 행복을 찾고도 싶고, 그런 기로에서 방황하게 되는 건 참으로 모순 속의 유랑인 것이다.

부산에 간다고 하던 날, 그리고 배에 타던 날 사찰계에서 와서 신상 조사를 할 때 대답하던 때의 내 태도. “당신이 그렇게 책임지고 말할 수 있소? 당신은 그이와 어떻게 되나요?”하고 물었을 때는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으나, “그럼 내가 교육부장으로 있으면서 그것도 모르겠소?” 하고 돌려 버린 일이며, 배에 오른 클라라를 바라만 보고 애매한 정훈이만 불러댄 내 심사며, 더구나 부산서 돌아왔을 때의 일은 너무나 우습게 기억되어 내 미친 정도를 말하는 것 같다.

뱃소리를 들었을 때! 자동차를 내어보내자고 하고, 문 선생이 온다고 핑계를 대서 헌병을 두 사람 보내면서 헌병한테는 클라라가 올 테니 마중나가 달라고 하고, 사무실에서와 아이들에게 따로따로 연극을 한 것은 참으로 우습고 또 너무나 대담한 일이었다.

자동차는 문 선생(원장의 친구)이 왔다는 바람에 곧장 떠나 부두로 달리는 것을 보았다. 실상은 클라라를 실으러 간 것이언만. 클라라가 명랑하고 밝은 얼굴을 한 것을 보면 내 마음도 공연히 약동하는 걸 느꼈다.

남이 주겠다고 해도 잘 안 받는 위인이 프레센트 재촉을 하는 듯한 것은 말이 하고 싶으니까 그런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너무 치근치근한 것 같아 부끄러워졌던 것은 물론이다.

그 날의 행복감, 많은 눈물 속에서 마음에 느낀 행복감은 절정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그저 오빠 누나 이렇게 느낀 것같이 생각됐는데 점점 엉뚱한 데로 흘러감을 어쩔 수 없었다.

남이 싫어할 것, 의심할 것도 생각 못하고 점점 미쳐 버리는 것이다.

“사랑으로 맺어 주소서”

황광은의 일기는 이어진다.

그 후 어느 저녁이다. 우연히 그를 방문한 나는 그와 마주앉아 기도했다.

“우리를 사랑으로 맺어서 일하게 하옵소서.”

솔직한 기도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같이 떠올랐다. 인생의 봄은 이런 데서부터 싹트기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알지 못한 흥분과 따뜻한 분위기, 그것은 너무나 황홀해서 전후를 잊을 정도였다.

말하지 말고 한 주일 지내보자고 확정한 것은 남들이 말을 한다기에 비로소 내 입으로 낸 말이다. 한 주일은 고사하고 사흘째 되는 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도 말하지 말자면서 말한다고 하면서 자기도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간격 없고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옆에다, 아니 한 지붕 안에 살면서 말을 안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드는 것이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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