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1) 덕암 정봉덕 회고록 / 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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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돌아보다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의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

이제는 ‘여전히 정정하다’는 말을 들으면 “나이는 못 속인다” 고 대답한다. 쉬지 않고 한 시간 독서하기가 힘들고, 접었던 책을 다시 펼칠 때는 분명 읽었던 내용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요즘은 예배 시간에 성경말씀을 찾다가 인도자가 불러준 장과 절을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 더욱 절실히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인 나이는 못 속인다는 것이다.

생각이 닿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예전같지 않지만, 쇠퇴는 모든 생물이 겪게 되는 자연의 질서이니, 이 또한 하나님의 법칙 안에 서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러니 이래도 저래도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참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단명의 집안 내력을 가지고도 일제 말기, 남북분단, 6·25전쟁의 산증인으로서 90해를 바라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때를 건강한 몸, 또렷한 정신으로 맞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고 나로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에게는 늘 좋은 벗이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제자매도 하나 없는 나를 하나님은 늘 주님의 사람들로 진 치시고 그들과 함께 평생 선교현장에 머물도록 하셨다. 지난 50여 년간 전국 교회와 함께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붙여 주신 실력있고 충직한 동역자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지할 가족이 없고, 또 가난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이다.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가시며 길을 예비하신 신실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내 인생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때의 감사와 감격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복이다. 처음 회고록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망설여진 것이 사실이다. 삶을 돌아보며 그 시절의 은혜를 곱씹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임에 분명하지만, 이것이 책으로 제작되어 하나의 기록으로 남는 것은 부끄럽고 민망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불충의 마음에 선뜻 응하기 어려웠다. 1967년, 장로 임직을 앞두고 되묻던 질문이 동일하게 찾아왔다. ‘내가 회고록을 쓸 자격이 있는가?’

십여 년간 잊고 있던 회고록 작업을 2015년 봄 미수에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권유 때문이었다. 한국교회의 격변기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여러 부서를 다니며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나누는 것이 그 시대를 함께한 벗들에게는 위로와 감사를, 앞으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이끌어 가야 할 후배들에게는 권면과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될지 모른다는 그들의 말이 나를 움직였다.

막상 작업을 시작하니,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여든이 넘어 옛 기억을 들춘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빠진 일이 있지는 않은지,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누군가를 잠시 잊은 것은 아닌지 염려도 생겼다. 하지만 지금 이때에 이 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아니 영원히 어린아이인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이 책을 펼쳐 보는 모든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2015년 겨울

덕암 정봉덕

천천히 돌아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1998년 2월, 한아봉사회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서대문 사거리를 지나 금화터널을 향하는데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격히 몸이 차가워 지고 급기야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어 독립문 직전에 위치한 세란병원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1년 전, 동일한 증상으로 전신마취 후 쓸개 제거수술을 받았었기에 이번에도 쓸개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위암 초기.

처음에 의사는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고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그날 오전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내 숨이 붙어 있는 날이 정해졌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2월 26일에 소집된 한아봉사회 총회 준비를 위해 일주일간 치료를 받고 우선 퇴원했다. 그리고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서둘러 처리하고 나머지는 김경주 간사에게 맡기고는, 서울대병원에서 개복수술을 받고 두 달 넘게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나의 병원 생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000년에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차에 치어 왼쪽 무릎 아래 뼈가 부서지는 바람에 이대부속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그 후로 1년 동안 무척 고생을 했다.

암으로, 이어서 차 사고로 15년 남짓 병원 신세를 지면서 육신의 약함을 경험한 것은 생명의 소중함과 지나온 날의 고마움을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치료 과정이 힘들고 예전 같지 않은 몸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는 한 번도 갖지 못할 귀한 시간을 허락받았으니, 나는 참 은혜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몸이 아파서 고통스러운 사람들, 그들을 곁에서 돌보느라 마음이 아픈 가족들, 그리고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야 하기에 괴로운 의사들과 간호사들…. 병원의 창문으로만 하늘을 보고, 때론 계절의 흐름에 무관심해질 만큼 숨 쉬는 순간순간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프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아프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었던 난데, 그동안 나는 누구의 벗이 되어 살아왔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웬일인지 어린 시절 생각이 자주 났다. 여전히 눈에 선한 고향 마을의 산과 들, 나무, 사람들. 그리고 그 곳엔 하루 종일 동네를 휘저으며 뛰어다니는 어린 내가 있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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