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모윤숙이 ‘사릉’에 춘원을 찾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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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은 정말 감회가 무량한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상기된 얼굴로 춘원을 찬찬히 바라본다. 1944년에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들어와 직접 토담집을 짓고 사는 춘원 이광수를 보고 싶어 모윤숙은 견딜 수 없었지만, 이곳에 오는 것만은 참고 또 참았다.

모윤숙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말 비밀스런 일이지만…. 그때도 어느 봄날이었다. 춘원이 즐겨 찾는 운악산 봉선사 다향실에 운거하는 춘원을 찾아가 밀회를 하다가 성질이 사나운 그의 아내 허영숙에게 들켜서 머리채 까지 뜯긴 기막힌 사건이 있었다. 이런 숨겨진, 어처구니없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만은, 그때 허영숙은 모윤숙에게 아주 강한 어조로 경고를 한 바 있었다.

“한번만 더 춘원과 연애질을 하다 들키면, 너 머리털을 싹 뽑아 버릴 거라고…. 그리고 사회적으로 너를 매장시킬 거라고.” 차후 절대 안 만나겠다고 약속을 해주고 그날 겨우 풀려 나온 모윤숙이다 보니, 꿈에라도 허영숙을 만날까봐 겁이 나는 모윤숙이 아닌가.

그러니 모윤숙이 오늘 이곳 사릉에 올 때도 자신의 머리털이 다 뽑힐 각오를 하고 온 것이나 다름없다. “자 우리집 한번 둘러볼까? 잠깐 밖으로 나가자.” 춘원은 어리둥절 하는 그녀를 집터 안 ‘망루서재’로 안내했다. 이곳 서재에서 춘원은 글을 쓴다고 했다.

춘원은 이곳에서 약 5년간 칩거하면서 많은 글을 썼다. 그의 수필집 ‘돌베개’를 초하고 자전소설 ‘나 스므 살 고개편’을 집필하고 또 ‘도산 안창호의 전집’을 쓰고, 자신의 자전적 기록인 ‘나의 고백’ 등을 쓴 유서 깊은 문학산실이 바로 이곳 ‘사릉’이라 했다.

모윤숙은 감동된다는 듯 서재 책상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춘원의 만년필을 만지작 거렸다. 서재를 보여준 춘원은 이 귀한 손님과 함께 걸으면서 미루나무 정자로 안내했다. 오늘은 날씨가 맑은 화창한 봄날이라 정자에 앉아 눈아래 흐르는 골짜기 물소리를 듣는 것도 꽤 정취가 있어 보였다.

두 사람은 정자 탁자를 마주하고 나란히 앉았다. 이때 이들을 보고 달려운 30대의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질그릇으로 만든 주전자에 따끈한 ‘보그’차를 끓여 갖고 왔다. 그 남자는 춘원이 좋아 오래전에 이곳에 와 춘원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는 박정호 집사(執事)다. 박 집사는 춘원과 모윤숙의 열렬한 팬이라 했다. 

눈 아래 펼쳐진 제법 넓게 보이는 밭에는 봄부터 여러 가지 채소와 작물이 심어진다 했다. 막 따라놓고 간 찻잔에서 보그차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주변 온 산야에 매화, 진달래, 철쭉이 질펀하게 피어 있어, 꽃으로 물든 정자 벤치의 분위기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만면에 행복한 웃음을 띤 춘원이 침묵을 깨면서 말했다. “자 차 마시지. 향기가 무척 좋군!” 여인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같이 들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얼마나 만나기를 기대했던가. 공인으로 또는 서로 유명인이 되다 보니, 서로 시간을 내서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춘원을 바라보는 모윤숙의 눈빛에는 오늘도 여전히 사랑의 강물이 슬피 흐르고 있었다. 살랑대며 불어 주는 봄바람에 ‘렌의 애가’의 피울음이 슬피 들려오는 듯도 했다. 두 사람의 마음에 형용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감정들이 문학적으로 지금도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선생님!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래서 좀 불안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오늘 ‘사릉’에서의 이 만남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숙아! 지금 외롭고 괴롭지만, 조금만 더 참아. 곧 좋은 날 올 거야.” “선생님도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좋은 날 곧 올꺼예요.” “아니야. 나는 다 끝났어. 내 운명은 내가 잘 알아.”

춘원은 체념하는 듯 몹시 어두운 얼굴 표정으로 모윤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춘원은 마치 유언처럼 말한다. “숙이! 내 오늘 숙의 손을 좀 잡아 봐도 될까? 이제 앞으로 이런 순간은 다시 없을 것 같아. 숙은 아직 나이도 젊으니 이 나라에서 할 일이 많아. 이 박사의 총애도 받고 있으니.”

그러면서 춘원은 모윤숙의 하얀 손을 덥썩 잡는다. 그동안 얼마나 잡아보고 싶었던 손이던가. 모윤숙도 잡힌 춘원의 손에, 같이 힘을 주며 춘원을 사랑의 눈빛으로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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